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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 l ll Jan 18. 2023

망각에 대하여.

  뚜렷이 기억나지 않는, 그런 지금이 좋아. 억지로 기억하고 싶지 않아.

  짧은 말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진해지는 말들이 있다. 끝이 보이는 인연을 이어가는 중이었고, 서로에게 내뱉은 말들은 깊은 상처 안에 더욱더 진한 흔적을 남겼다. 낮게 떨리는 음성들 사이로 그 한 마디가 뚜렷이 들렸다. 긴 침묵 속에서 낯선 오토바이 소리와 가벼운 목소리들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렇게 그는 내가 없는 익숙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무엇을 먹을 수 있는지 몰라 사 왔던 고구마라떼였다. 그게 다시 내 시선 안으로 들어왔다. 옅게 남은 파마끼에 정리되지 않은 흰머리 아래로 고개를 내밀고 맑은 두 눈을 반짝거렸다. 아니야 할머니, 내 것도 있어. 나는 같이 사 온 커피 한 잔을 살짝 들어 보여주었다. 할머니는 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5분 간격으로 언니와 내가 누군지 확인하고 안심하고를 반복했다. 첫째 고모에 대해 계속 물었다. 언니는 잘 있니. 다 보고 싶은데 왜 한 번 오질 않니. 그러면 언니는 할머니. 나 할머니 딸 아니야. 할머니 막내아들 있지? 기원이. 기원이 딸 수연이야. 할머니 손녀야. 그러면 할머니는 이제 죽어야 된다고 미안하다고. 그리고 이내 간격을 두고 또다시 반복되는 대화를 이어갔다. 낯선 이를 보는 듯한 불안한 눈빛이 차츰 줄어들 무렵, 이전과 다른 뚜렷한 음성이 들렸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

  언니는 고구마라떼를 마시는 할머니의 아래턱을 받쳤다. 입술 옆으로 흘러나온 물줄기가 목을 타고 턱밑으로 흘렀다. 나 할머니 딸 아니라니까. 언니는 그 말 이후로 할머니가 물어보는 것들에 대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나는 억지로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잊혀져가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진실과 망각과 고통에 대해서. 그때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지울 수 없는 것들을 내려놓는 게, 나는 너무 무책임해서 숨이 턱턱 막혔었다. 나눠 들고 있다고 생각했던 짐을, 그가 말없이 놓아버린 기분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와 같이 고민했던 모든 것들이 무너져내리는 순간이었다. 서두르는 발걸음 사이로 그는 이런저런 말들을 계속 덧붙였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널 신경 써 줄 수 없어. 그리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여기서 더 힘들고 싶지 않아.


  난 지금 충분히 힘들어.


  나는 마치 그를 보고 있는 것처럼, 말없이 끄덕였다. 잠긴 목소리였다. 그래. 그 한 마디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잊혀지고 사라지는 것들을 기록하고 담는 것에 온종일 쏟던 순간들이, 힘겹게 잡고 있던 팽팽한 고무줄을 놓는 것처럼 빠르게 줄어들었다. 차오르는 감정들을 담아내는 게 너무 힘겨워서 그래서 나 또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갈 시간이 다 되었을 무렵, 할머니는 입술을 꼭 다물고 양손을 흔들었다. 주차장을 걸어가며 여러 번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할머니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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