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이탈리아 여행기 18-04022023
슬로시티 오르비에토, 그리고 로마 입성
#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와 이탈리아에 관해 누구나 떠올리는 대표적인 격언이다. BC 500년대에 이미 공화정을 설립하는 등 유럽 문명의 기초를 세우고 대륙을 호령했던 로마 제국의 권세를 뜻하기도 하고, 실제 로마로 이어지는 엄청난 길이의 도로를 건설했던 역사를 일컫기도 한다. 유럽, 이탈리아와 수천 km 떨어진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나조차도 이 격언을 알고 있을 정도면 로마제국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2023년 우리의 이탈리아 여행 일정 중 정중앙에 위치한 여정이 로마였고, 예전부터 Hong이 상당한 애정과 찬사를 표했던 로마였기에 기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우리 여정 중반의 하이라이트였던 듯하다.
# 슬로시티 오르비에토
토스카나에서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준 아늑하고 멋진 숙소 아그리투리스모 마리넬로를 뒤로 하고 우린 또 다른 중세 도시 오르비에토(Orvieto)로 향했다. 로마로 향하는 여정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방문하게 된 이곳은 높은 바위산 위에 세워진 도시로 대략 9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이러한 역사 말고도 이 도시는 슬로시티(Slow City) 혹은 치타슬로(Citta Slow) 운동의 발상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슬로시티 운동은 1987년 패스트푸드에 맞서 지역 고유의 음식을 지키기 위해 시작된 슬로푸드(Slow Food) 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시작된 운동이다. 1999년 시작된 슬로시티 운동은 도시의 삶 전체에 느림을 도입하자는 기조 아래 생태 보호, 전통문화 보존, 슬로푸드 농법, 지역 특산품, 공예품 보존, 지역민을 중심으로 한 지방의 세계화(Glocalization)를 표방한다고 한다. 한 마디로 일방적인 세계화와 글로벌 대자본 중심의 신자유주의 시스템에 맞서 지역과 지역민, 지역문화를 중심으로 한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만들어가는 운동이라 할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 오르비에토의 이러한 실험은 아직까지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르비에토에는 당연히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점도, 대형마트도 없고, 도시 내에 자동차 통행도 제한이 된다. 높은 바위산에 위치한 이 도시를 방문하려면 산 아래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푸니쿨라(Funicolar)로 불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도시로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도시를 둘러보기 위해선 오로지 걸어 다니는 방법 밖에 없다. 물론 도보로 충분히 둘러볼 수 있는 면적이긴 하지만, 산 아래 주차를 하고, 푸니쿨라를 타고 산 위의 도시로 올라가는(푸니쿨라를 타기 위해, 그리고 내려서 걷는 거리도 꽤 된다.) 과정이 번거롭다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도시 내부로 들어가는 순간 그 수고로움은 다 잊힐 만큼 평화로운 분위기의 고풍스러운 경관을 만나게 된다. 사실, 오르비에토처럼 다른 나라의 유명 관광지 중 접근성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경우들이 많다. 관광객 입장에서는 불편하다 여길 수 있겠지만, 이는 관광객들의 편의를 중시하기보다는 본래의 모습과 환경을 유지하는 것을 중시하는 가치관의 반증이 아닐까. 한국의 경우 어디나 관광 편의성을 증진하겠다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편의성을 이유로 오히려 경관성이나 지역성을 해치는 시설을 갖다 놓는 건 관광지로서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본래 그 지역에서 살아온 주민들의 삶의 궤적 없이는 관광지로서의 명성도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작고 평화로운 도시에는 세계적인 명성을 갖고 있는 오르비에토 대성당이 있다. 이 도시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인데, 1290년부터 1607년까지 300년 넘는 시간 동안 지어진 웅장하고 아름다운 대성당에는 성체에서 흐른 성혈이 묻은 수건이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오랜 건축 기간으로 인해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이 혼합된 바람에 미묘한 조화의 미감을 만날 수 있는 성당이다. 특히, 흑백이 교차로 구성되어 있는 측면 외벽이 나의 눈길을 끌었는데 이 벽면은 이 지역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투파라는 석회암을 흑백으로 번갈아 축조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성당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시간이 다 된 시간이었기에 성당 맞은편에 위치한 피제리아(Pizzeria)에서 점식 식사를 하기로 했다. 마침, 날씨도 매우 좋아서 야외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아 성당의 아름다운 외관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따뜻한 봄볕 아래 대성당의 웅장한 정면을 마주 보며 먹는 피자의 맛이란,,, 이런 게 바로 여행의 맛이 아닌가.
# 삶은 계속된다. 살아가는 곳이 어디일지라도.
오르비에토의 필수코스로 알려져 있는 곳이 바로 지하도시다. 이탈리아 곳곳에 이와 비슷한 지하 도시 내지 동굴도시들을 꽤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예전 기독교 박해를 피해 숨어 살기 위한 방편으로 만든 공간이거나 혹은 여러 환경적 이유로 인해 만들어진 곳들이다. 약 2500년 전에 만들어진 오르비에토의 지하 도시는 그 연원이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는데, 총 1,200개의 지하 터널이 있고 이 면적이 오히려 도시의 지상 면적보다 넓다고 한다. 엄청난 규모의 지하 동굴 중 2개만 공개되고, 보통 하루에 2번 가이드 투어를 통해서만 둘러볼 수 있다. 점심 식사 전에 가이드 투어를 예약해 놓았던 우리는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신비로운 지하 동굴 도시로 입장했다.
이 지하 도시가 놀라웠던 건 사람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시설, 공간들이 거의 완벽하게 조성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생존에 필요한 물을 얻기 위한 우물, 죽은 이들의 무덤, 심지어 올리브유를 흡착하기 위한 흡착기까지. 그리고, 가장 놀라웠던 건 동굴 벽면에 뚫린 구멍들의 정체였는데 성인 남자의 주먹 하나 반 정도가 들어갈만한 크기의 구멍들의 용도는 바로 비둘기를 사육하거나 유인하기 위한 일종의 새장이었다고 한다. 비둘기를 사육하는 건 키워서 팔기 위함이었다고 하니, 그 오랜 옛날에도 생계는 중요했구나... 새삼 밥벌이의 고됨과 위대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먹고살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모든 인간들에게 존경을.
2천 년도 더 전인 기원전이라 일컬어지는 때에 이렇게 거대한 지하도시를 건설했다는 건 여전히 미스터리에 가까운 역사다. 추정은 가능하겠으나 정확히 무슨 이유로, 어떻게 지었으며 누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등은 지금 알 수가 없다. 그저 옛사람들이 일구어낸 엄청난 지하 공간에 대한 놀라움과 경외심만 있을 뿐. 역사와 유적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는 게 이런 것이다. 인간과 인간이 만들고 전승하는 문화와 문명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 그렇기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겠지. 과연 우린 지난 역사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고 있을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 드디어 로마에.
오르비에토를 떠나 렌터카를 타고 로마로 향했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예약해 놓은 숙소에 도착하니 거의 저녁 시간. 로마에서의 첫 숙소였던 한인 민박 사장님이 추천해 주신 한식뷔페식당을 찾아가 저녁을 해결했는데 그 어떤 한식당보다도 훌륭했다.(식당은 맘마 꼬레아나_Ristorante Mamma Creana https://maps.app.goo.gl/8iMcmZNxyQhcMPGf9 한국엄마라는 뜻으로 식식당과 너무 찰떡인 작명) 본래 백반 스타일의 한식을 좋아하는 내 취향에도 딱이었거니와 멀고 먼 이국에서 한식뷔페라니 놀랍지 않은가. 음식 맛은 말할 것도 없이 그냥 한국의 맛. 오래간만에 혀에 통각을 느끼며 한국 소주까지 함께 곁들인 진수성찬이 하나도 부럽지 않은 식사를 마치고 숙소 주변을 돌아본 후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