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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Oct 22. 2024

고통에 대해 쓴다는 것

1.

  10월 글쓰기 수업에서 아이들과 나는 고통에 대해 쓴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중간고사를 앞둔 날이었다. 나는 몇 가지 사례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살만 루슈디가 피습 후에 쓴 <나이프>의 문장을 읽어주기도 했다. 작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도 있었다. 이틀 뒤 작가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야기의 끝에 "그래서 얘들아 우리가 고통에 대해 쓸 수만 있다면 그 고통에 끌려가지 않고."라고 말하고 나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철새들이 따뜻한 남쪽을 향해 부등호 모양으로 긴 줄을 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 소연이가 말했다. "주인이요. 고통의 주인이요." 어떻게 알았을까? 그 아이는.

  소연이는 지금 아프다. 하지만 아이는 그 고통의 일부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소연이는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어 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은 아니었을까? 고통의 주인이 되고 싶은 강렬한 삶의 의지 같은 것이 그에게는 있지 않았을까? 나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송이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나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2.

  나는 지금도 내게 일어났던 그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나의 행복은 그 고통의 나날들 이전의 행복이 아니다. 때로 그때 일들이 선명하게 떠오르기도 하고, 악몽을 꾸고 한밤중에 일어나 가만히 앉아 있기도 한다. 깨어있을 때도 잠들었을 때도 내 삶의 어딘가에는 그 고통이 숨결처럼 깃들어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그 고통을 피하지 않고 있다는 것, 그 고통을 뚫고 나아가려 한다는 것이다. 나의 고통 못지않게 당신의 고통에 가닿으려 한다는 것이다. 나는 가르치는 사람이니 가르침과 배움을 통해서 고통의 문제에 맞서려고 한다. 나는 옛 학교의 퇴임식 때 그렇게 말했다. 누군가는 아름다움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름다움 따위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말하겠지만 결국 사랑이어야 하고 아름다움이어야 한다고. 폭력 앞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그것이었다.


  다음 수업 전에 나는 교실 칠판에 이렇게 적어놓고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

  "내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이자 여기서 내가 전하려는 이야기의 본질은 사랑이 증오에 - 칼은 증오의 은유다- 응답하고, 결국 이긴다는 것이다." - 살만 루슈디, <나이프>

   

3.

  그날 수업이 끝나갈 무렵, 말이 없던 작은 남자아이가 손을 들고 말했다. 동생이 사슴벌레를 집으로 가져왔는데 아버지가 '야구공을 던지듯이' 사슴벌레를 벽에다 던져버렸다고. 그래서 많이 울었다고. 울음을 겨우 참으며 아이는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아이들과 나는 이렇게 다시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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