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이의 망한 머리에서 배운 것

인생은 완벽하지 않아서 더 사랑스럽다

by 빛날애

우리 집 사춘기 삼 남매 중 보물 1호는 도무지 꾸미는 것에 관심이 없다. 안 그래도 머리숱이 많고 반곱슬인데, 초등 시절 한두 번 매직을 해보더니 그 시간들이 너무 지루했다며 미용실이라면 질색팔색을 한다. 그런데 이번엔 도가 지나쳤다. 내가 붙여준 별명은 해리포터의 ‘헤그리드’. 아무리 놀려도 아이는 타격이 없다. 머리는 부스스하고 어느새 가슴까지 내려왔다. 이번만큼은 도저히 물러설 수가 없었다.

해리포터 '해그리드'

“엄마가 집 앞 미용실 예약했어.”
“아......... 엄마..... 왜요?”
“왜긴 뭐가 왜야~ 너 머리를 봐. 무겁고 덥잖아. 시험도 끝났으니 시원하게 자르자. 응?”
“아....... 네.”


‘야호! 이번엔 드디어 성공이다.’


예약한 시간에 미용실을 방문했다. 문을 열자 특유의 향이 풍겼다.


“안녕하세요.”
“학생, 머리 어떻게 자를까?”
“숱 좀 치고, 여기까지요.” (가슴 바로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너 머리숱이 정말 많다~”


싹둑, 싹둑ㅡ
머리카락을 자르는 가위 소리가 시원했다. 내 속도 함께 뚫리는 기분이었다. 머리 감을 때 편하겠지, 말릴 때도 금세 마르겠지. 그 생각만으로도 후련했다. 그런데 기대감으로 가득했던 공기가 점점 서늘해졌다. 머리카락이 잘려나갈수록 아이 얼굴이 붉어지고, 마주 보는 거울 속에서 힐끔힐끔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 시선을 알아차렸지만, 미용사분이 불편하실까 봐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완성된 머리를 본 순간, 나도 알았다. ‘음.... 이건 아니다.’


“보물 1호야.... 어때?”
“아........ 엄마.....”


아이에게 미안하지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미용사분께 부탁드렸다.
“원장님, 죄송하지만... 혹시 층을 조금만 더 내주실 수 있을까요?”

결국 머리는 예상보다 짧아졌고, 유치원 졸업 이후 처음 보는 머리 길이였다. 시원하기보다 낯설었고, 그 낯섦이 아이의 눈물을 불러왔다. 서둘러 결제를 하고 미용실을 나왔다.


“아~~~~ 엄마 미쳤어요!!!”
“왜~~~ 시원하고 예쁜데 왜~(미안, 보물 1호야)”
“뻥치지 마요.... 엄마, 이건 아니잖아요.... 엉엉.... 이건 아니야~~ 완전 임우일이잖아~~~~~~엉엉엉”

출처 라디오 스타 임우일 개그맨

나는 웃음이 터졌고, 아이도 울다 웃다 결국 함께 웃었다.


"엄마 왜 웃어요~~ 웃지 마요!! 하하... 엉엉........ 큭큭"

"미안해 하하.... 악... 큭큭"


길 한복판에서 울면서 웃으며 서로의 배를 붙잡았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날 이후 일주일, 아이는 점점 나아졌지만, 미용실을 원망하다가 이 정도면 괜찮다며 위로하다가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시소를 탔다.


“엄마, 아 진짜 그 미용실 다시는 가지 마요! 진짜 엉망이야!”
“하하, 알겠어. 그래도 점점 괜찮아지는 것 같지 않아?”

"아.... 뻥치지 마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오늘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가 말했다.


“엄마, 애들이 제 머리 나름 괜찮대요. 해미는 오히려 전보다 이게 낫대요. 전에는 너무 산적 같았대요. 하하”
“그렇지! 엄마도 그렇게 생각했어. 지금이 훨씬 나아. 귀엽고. ”
“이미 망한 거 어쩌겠어요. 이제는 그냥 괜찮아요.”


머리가 자리를 잡은 건지, 마음이 자리를 잡은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것이었다. 망한 머리도, 부끄러운 순간도, 잠깐의 후회도. ‘그때 그 미용실을 예약하지 말 걸’, ‘처음부터 층을 내달라 말할 걸’ 하는 후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는 나를 치유하지 못한다. 그저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다듬을 뿐이다.


요즘 많이 불완전했다. 한바탕 시끌벅적했다가,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만 남은 주방에서 혼자 컵을 씻다가 물소리에 묻혀 울던 내 얼굴을 문득 들여다봤다. 나는 나의 우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괜찮은 척,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밀어냈다. 남들에게는 제법 친절하다는 말을 듣는 나는 나한테 만큼은 이상하게도, 참 각박하다. 남한테는 웃으며 말 건네면서도, 내게는 한마디도 못 건넨다. 가끔은 그런 내가 안쓰러워 안아주고 싶다가도, 이내 다시 다그치며 채찍질했다. 이렇게 나를 다독이지 못하는 내가 사람들을 위로하는 글을 쓸 수 있을까. 그 생각에 다시 무너지고, 또 슬퍼졌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을 살아냈다. 아이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기도 하고, 남편과 일 때문에 투닥거리기도 하면서 보통의 일상을 살았다. 눈물을 흘리다가도 허기가 져서 냉장고 문을 열고 간식 창고를 뒤적였다. 생각해 보면, 그 모습이 조금 웃기지 않은가. 그렇게 잠깐의 웃음으로 또 하루를 버텼다. 그렇게 버티는 나날 속에서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삶은 흠집이 나야 빛이 드는 게 아닐까. 예측할 수 없는 모서리들이 우리를 다치게도 하지만 결국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우리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이끄는 고마운 불안인지도 모른다. 삶은 모서리에 부딪혀야 비로소 자신의 모양을 안다.


인생은 매끄럽지 않아서 좋다. 그 거친 면에서 우리가 사람다워진다. 그리고 그 불완전한 삶 속에서도 단 1초라도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잘 살아내고 있는 얼굴일 것이다. 오늘 큰아이에게 배운다. 망친 머리처럼, 삶도 시간이 지나면 제자리를 찾는다는 걸. 낙천주의는 비극의 반대가 아니라, 그 한가운데서도 다시 웃을 수 있는 힘이라는 걸. 희극 속에서도 우리는 울 수 있고, 비극 속에서도 여전히 웃을 수 있다. 희극과 비극은 언제나 함께 있다. 그리고 그 경계 어딘가에서 오늘도 우리는 웃다가 울며 살아간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하마터면 놓칠 뻔한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