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ㅣ온기
서울역에 내렸다. 사람들의 얼굴엔 설렘이 들꽃처럼 번져 있었고, 나는 그 틈에서 유독 흐릿한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발아래 낯선 골목들이 얼기설기 얽혀 있었고, 나는 그 골목의 결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작년 이맘때였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지난주 일요일. 책을 사랑하고, 삶을 글로 견디는 사람들이 모인 피오나의 첫 번째 생일이었다. 수없이 망설였다. 가지 않으면 오래 마음에 남을 것 같은 예감이 있었다. 용기를 냈다. 문밖으로 한 걸음 나섰다. 고마움과 이해할 수 없는 미안함이 한 데 뒤엉켜 있었고, 그 마음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다. 굳이 색깔을 붙이자면, ‘초록’ 일까. 떨리는 손으로 케이크를 들고 문을 열었을 때, 생각보다 훨씬 따스한 온도가 나를 감싸 안았다. 반겨주고, 안아주고, 말없이 등을 쓸어내려 주는 손길들. 지금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가슴 한쪽이 물결처럼 흔들린다. 돌아오는 길, 버스 창밖에 기대며 생각했다. 이렇게도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는데, 나는 왜 나약해지는 걸까. 답은 있었다가도 없었고, 손에 잡힐 듯하다가도 멀어졌다.
언제나 나를 동굴 밖으로 불러내어 주는, 따뜻하고 고운 작가님, 괜찮다며 잠시 쉬어도 된다고 말해준 든든하고, 사랑스러운 작가님, 내 글을 기다린다고 작은 불빛을 건네준 햇살 같은 작가님, 말없이 힘껏 안아주었던 작가님들. 무거운 글에도 따듯하게 응원해 주시는 그 마음들은 첫눈처럼 조용히 떨어져 머리와 어깨, 그리고 가슴 위에 소복하게 쌓였다. 겨울이지만 따뜻하고, 춥지만 포근하다.
평소엔 핸드폰을 잘 보지 않는다. 일과 아이들 사이를 오가며 바쁜 척 숨기 바쁠 때가 많다. 가끔은 마주칠 용기가 없어 골목을 돌아가고, 가끔은 그냥 혼자가 편해서 동굴 안에 잠시 몸을 누이기도 했다. 그런 바보 같은 나를 내가 제일 잘 안다. 그런데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카톡이 울렸다. ligdow 작가님의 고운 목소리가 담긴 '음성 메시지'. 놀라 떨리는 마음으로 음성 메시지를 듣자마자 마음 깊은 곳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런 마음을 내가 받아도 되는 걸까. 고맙고, 미안하고 너무 따뜻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마 오래도록 잊지 못할 천사 같은 목소리였다.
ligdow 작가님이 낭독해 주신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_림태주>
오늘 내가 하는 말에 몇 퍼센트의 산소가 함유되어 있는가. 나를 살리고 타인을 살리는 말이 내 몸속에 저장되어 있어야 한다. 연금술이란 별거 없다. 그 사람을 빛나게 해주는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 연단술이란 게 별거 없다. 그 사람을 숨 쉬게 하고 살리는 말을 아끼지 않으면 된다. 어느 때는 청량한 물로 어느 때는 뜨거운 피로 어느 때는 달큼한 과즙으로 스며들면 된다. 오늘 당신이 제조한 불사의 언어, 당신이 발견한 현자의 언어는 무엇인가.
그 문장은 마음에 스며들며 오래도록 따뜻했다.
ㅣ우울의 쓰임
진단을 하나 받았다. 오래 짙어진 마음의 안개를 걷어내기 위해, 나에게 맞는 약을 천천히 찾아가고 있다. 몸과 마음이 서로를 따라잡기까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럼에도, 고시원과 스터디카페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고, 고시원 원장의 숙명처럼 찾아오는 쓰레기방도 또다시 눈앞에 놓였다.
몸은 무기력한데도 일은 묘하게 굴러가고, 마음은 우울한데도 사람들 앞에서는 밝게 웃기도 한다. 나를 웃게 하려고 어설프게 애쓰는 남편을 보며 다시 힘을 낼까 고민하고, 작가님들의 응원을 받으며 하루를 겨우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학원을 끊고 혼공을 해보겠다고 선언한 둘째 아이는 중학교에 들어와 처음으로 치르는 시험을 앞두고 있다. 불안증 약의 부작용 때문에 한 번도 본 적 없던 충동과 깊은 우울감이 아이에게 찾아왔고, 우리는 두 번째 병원으로 옮겨 약을 바꾸었다. 다행히 아이는 조금씩 괜찮아졌고, 그것이 약의 부작용이었다는 사실에 함께 안도했다. 엊그제는 기분이 꽤 괜찮았던 날이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무기력의 독침이 잠시 빠져나간 듯 몸이 가벼웠고, 그래서 조금 기뻤다. 그런데 그날 오후, 하교한 둘째 아이의 또다시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하루 종일 차곡차곡 쌓아 올린 기운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나는 아이 앞에서 불안을 들키지 않으려고 단단한 얼굴을 새로 단장하고, 넘어뜨려진 마음을 조용히 주워 담는다. 무너져 내린 기운은 다시 아이와 함께 차곡차곡 쌓아보기로 한다. 마치 둘이 손끝으로 작은 성을 다시 쌓아 올리듯, 천천히.
내일은 아빠의 기일이다. 여전히 나를 ‘아가’라 부르는 호랑이였던 엄마는 이제 어린 소녀처럼 기다리고 있다. 엄마를 만날 때는 우울한 세모, 네모 감정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동그라미 감정 하나를 조용히 꺼내어 품어본다. 우울해도 지켜야 하는 마음이 있기에.
김종원 작가님의 글처럼, 세상에 쓸데없이 머무르는 감정은 없을 것이다. 우울도 희망이 되는 문장을 데리고 올 수 있고, 어둠 속에서만 피는 꽃도 있으니까. 글을 쓰지 않았던 시간 속에서 나는 이미 조용히 눌어붙은 문장의 기척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문장이 마침내 나를 찾아왔다. 우울한 글은 정말 쓰기 싫었지만, 누군가에게 작은 불빛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생각의 각도를 조금 틀어보았다.
나는 글을 쓰지 않았던 시간에조차 마음속 어딘가에서 문장을 붙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문장들은 어둠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나를 기다렸다. 이제야 알아차린다. 쓰지 않은 시간도, 결국은 글의 일부였다는 것을.
세상에 쓸데없는 생각은 없다.
당신은 글을 쓰지 않았던 시간에도 글을 썼다.
아니, 조금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글을 쓸 준비를 했다.
세상에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은 없다. 쓰거나, 쓸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글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_저자 김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