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실료가 밀린 어느 입실자
우리 고시원에 들어온 지 석 달도 되지 않은 J 입실자는
차일피일 입실료를 미루다 결국 한 달이 훌쩍 지나도록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고, 문자도 읽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결국 발길을 옮겼다. 직접 만나야 끝날 일이었다.
고시원 운영 3년 차. 웬만한 일엔 흔들리지 않는다 생각했지만, 그 방 앞에 서니 심장이 한 번 크게 내려앉았다. 숨을 고르고, 노크를 했다.
똑똑똑.
“J입실자님, 원장입니다.”
안쪽에서 미세한 부스럭거림이 들렸다. 분명 안에 있다.
“안에 계신 거 알아요. 문 여세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 이 일을 오래 하며 나도 모르게 익혀버린 태도였다.
다시 한번 노크. 5초의 정적. 그리고 문이 열렸다.
방안은 예상대로 난장판이었다. 코를 찌르는 쾌쾌한 냄새, 발 디딜 틈 없는 쓰레기들. J님은 축 가라앉은 얼굴로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화도 안 받으시고... 무슨 일 있으세요?”
“그냥... 힘들어서요. 요즘 일도 못 나가고...”
“그래도 일은 나가셔야죠. 이렇게 방 안에만 계시면 더 힘들어져요.”
말끝마다 그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키는 내게서 한참 위였지만, 마음은 바닥에서 헤매는 것처럼 보였다.
“입실료 한 달치 이미 밀렸고, 다음 달 날짜도 다가오고 있어요. 알고 계시죠?”
“네...”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갈게요.... 그런데... 밀린 입실료 낼 돈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말이 방 안의 냄새보다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편과 나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그 짧은 신호.
“알겠어요. 가져가실 짐만 챙기세요. 나머지는 저희가 치울게요.”
남편은 봉투를 가져와 그에게 건넸다.
“필요한 것만 담으세요. 나머지는 저희가 정리할게요.”
“네, 네.”
우리는 아래 사무실로 내려왔다.
“휴... 저 방 어떡하지.”
“힘들겠지만.... 어쩔 수 없지.”
“방세는 그냥 안 받는 게 낫지?”
“응. 받을 생각도 없었어.”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여보, 혹시 현금 조금 있어?”
“응, 오만 원.”
“그거... J님한테 드릴까?”
남편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늘 이랬다. 누군가 어려우면 같은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조건 없이 주는 일 앞에서는, 늘 둘이 한마음이었다. 30분 뒤, 다시 문을 두드렸다. 짐은 제대로 챙기지 못한 듯 어수선했지만 그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보였다.
“옷은 다 버리고 가시는 거예요?”
“네...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몇 벌은 가져가세요. 다시 사야 하잖아요.”
그는 조심스레 몇 벌만 챙겨 들고 방을 나섰다.
“J님, 가실 곳은 있으세요?”
“네...”
나는 조심스레 오만 원을 내밀었다.
“받으세요. 택시라도 타세요.”
그의 눈이 잠시 크게 흔들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민폐만 끼쳐서....”
“괜찮아요. 앞으로 건강 챙기시고, 일도 조금씩 다시 해보세요. 조심히 가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담배를 한 개비 피우겠다며 골목길로 걸어갔다. 큰 키에 구부정한 어깨가 겨울 골목에서 더 작아 보였다.
빛이 거의 닿지 않는 틈을 겨우 찾아 걷는 사람처럼. 우리는 그 흔들리는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 서 있었다.
“춥다. 여보, 들어가자.”
“응.”
그날 밤, 쓰레기를 대충 정리하고 고시원 계단을 내려오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사람은 누구나 삶의 어두운 골목 하나쯤은 품고 산다는 것. 스스로도 길을 잃었다는 걸 알면서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 더 깊숙이 숨어버리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 J님의 뒷모습은 어딘가 내 지난 시절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빛을 피하듯 걷고, 손에 쥔 것이 없어 부끄럽고, 누군가의 눈을 마주치는 게 두려웠던 때.
그때 내 손을 잡아 올려준 사람들도 결국은 이유보다는 마음으로 다가왔었다.
그 생각이 들자, 오늘 우리가 건넨 오만 원이 꼭 ‘돈’이 아니길 바랐다.
잠시라도 따뜻한 숨을 돌릴 수 있는 작은 징검돌, 흐트러진 마음이 다시 삶으로 발을 디딜 수 있는 아주 작은 다리였으면 좋겠다고. 우리는 때로 ‘도움’이라는 이름을 과하게 무겁게 생각하지만, 누군가에게 가장 필요한 건 거창한 구원이 아니라 추울 때 잠시 쥘 수 있는 작은 손,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는 말 한마디를 들어줄 귀, 쓰러지지 않도록 받쳐주는 아주 미세한 온도인지도 모른다.
J님이 어떤 길을 걷게 되더라도 오늘 그에게 스쳤던 따뜻함이 아주 깊숙한 곳에서 작은 기억으로 남아 언젠가 다시 일어설 힘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도 그런 마음을 잃지 않고 오래 살아낼 수 있기를.
마음을 쓰는 일은 결국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마음을 건넸을 때 내 안에 어떤 울림이 남는가로 완성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정말로 돈이 없었을까. 어쩌면 그것은 우리에게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설령 그의 말과 몸짓이 모두 거짓이었다 하더라도, 나는 아마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를 이곳에 머물게 한다면 앞으로도 일은 나가지 않을 것이고, 입실료 역시 밀릴 것임을 어렴풋이 예감했다. 차라리 세상 밖으로 한 발 내디디게 하는 편이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더 나은 길이라 생각했다.
그날 J님에게 건넨 손길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돕는 순간보다 돌아서는 우리의 걸음에서 더 깊이 느껴졌다. 어쩌면 선의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 같다. 누군가의 겨울에 조그만 불빛 하나 놓아두면, 그 불빛은 결국 돌아오는 우리의 마음을 가장 먼저 미세하게 비춰낸다.
그래서 그날, 조금 차갑던 저녁 공기 속에서도 나는 이상하게 덜 흔들리고, 조금 더 단단해져 있었다. 타인을 향해 건넸던 따뜻함이 먼저 내 마음을 데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천천히 알아갔고, 그 마음이 결국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다는 걸 그날 밤 비로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