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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경단 Oct 31. 2022

고부갈등은 피하고 싶어

P은행 지현서 계장의 이야기 11

오후 4시가 되고 은행 셔터문이 내려왔다. 본격적으로 마감업무 시작인 것이다. 현서는 오만 원권부터 차례로 개수기에 넣고 시재를 세기 시작했다.


“드르르르륵”


만 원권, 오천 원권, 천 원권, 그리고 동전들... 3년이 넘게 매일 맞추는 시재이지만 여전히 할 때마다 살짝 긴장이 된다. 혹여나 시재가 안 맞으면 매우 곤란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맞아야 하는 시재가 안 맞으면 그날 하루에 했던 모든 업무를 다 뒤져보면서 어디에서 틀렸는지 찾아야 한다.


시재가 틀리는 경우는 꽤 다양하다.

고객에게 잔돈 거슬러주는 것을 깜빡했거나,

받아야 하는 수수료를 깜빡했거나,

금액을 잘못 입력했거나,

고객한테 주거나 받은 돈을 잘못 계산했거나,

현금이 수반되지 않는 대체거래와 현금거래 구분을 잘못했거나,

환전할 때 매도와 매입을 거꾸로 했거나,

환율 투입을 잘못했거나...


시재를 틀리면 일단 마감업무는 뒤로 하고 우선적으로 시재를 찾아야 하는데, 시재를 찾기 전까지는 지점 전체 마감을 못 하게 된다. 이 말인 즉, 시재를 틀린 직원 때문에 전 직원이 퇴근을 못 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어떤 거래에서 시재가 남았는지 찾으면 그 고객 계좌로 입금해주고, 어디에서 모자란 지 확인이 되면 고객에게 시재를 돌려 달라고 요청을 해야 하는데, 시재를 찾은 것은 무척 다행이나 고객에게 전화하는 것이 상당히 죄송스럽고 힘든 일이다. 귀찮고 성가시다며 화를 내는 손님들이 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양해를 구하게 되는데, 이럴 때마다 아무리 바빴어도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일 걸, 왜 실수했을까 하는 자책을 하게 된다.


아마 은행원이라면 수도 없이 경험하지만 해도 해도 적응되지 않는 것이 ‘시재 틀림’이 아닐까 싶다. 매일 일어나는 일은 다양하고, 고객도 다르기 때문에 시재를 틀리면 밤늦게까지 찾게 되는 상황도 생기기 때문이다.


나 때문에 전 직원이 퇴근을 못 하고 기다리게 되는 상황은 시재를 틀린 것보다도 더 스트레스다. 밤을 새더라도 나 혼자 새우면서 시재를 찾고 싶은데. 고객에게도, 동료 직원들에게도 죄송한 상황인 것이다.


현서도 신입 때는 여러 번 시재를 틀려서 밤늦게까지 울면서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시재를 찾곤 했었다. 오늘도 금액을 세며 부디 시재가 딱 맞기를 바라며 마감을 하는 중이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VIP실에서 4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여성고객이 까만색 C사가방을 어깨에 메고 나왔다. 이미 4시가 넘어 셔터문이 내려온 상태라 VIP실 담당인 PB 팀장이 직원용 철문을 열고 손님을 배웅했다.

현서의 레이더망에 가방이 들어왔다. 현서가 사고 싶어 했던 바로 그 가방의 한 사이즈 큰 버전. 또다시 브라운 컬러의 가방이 생각났다. 생각할수록 속상한 내 예물 백.


보통 명품백으로 사는 예물 백은 실로 여자들에게 의미도 크고 중요한 물건이다.


대표적인 사치품이자 누군가는 형편도 안 되면서 허영심만 가득 차서 사는 거라며 욕도 먹지만, 어쨌든 솔직히 하나쯤은 갖고 싶은 명품백. 평소에 사기 어려운 값비싼 가방이라 큰돈 들어가는 결혼을 계기로(혹은 빌미로) 묻어가는 맘으로 하나 사게 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예물 백을 샀다고 하면 당연히 무엇을 샀는지, 얼마인지 궁금한 게 여자들의 세계다. 나는 무얼 샀는데 너는 무얼 샀는지 은근히 비교를 해보면서 재력을 짐작해보기도 한다. 누군가는 혹시나 나중에 가세가 기울었을 때 팔아서 생활비로도 쓸 수 있어야 하기에 무조건 값나가는 것으로 사야 한다고도 한다. 


예물 백을 쓰는 여자들의 부류는 딱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닳으랴 아까워서 못 매고 장롱에만 넣어두다 어쩌다 한두 번씩 꺼내어 드는 ‘장롱파’, 그리고 비싼 돈 주고 샀으니 뽕을 빼겠다고 닳고 닳을 때까지 들고 다니는 '뽕빼파’. 하지만 이 둘의 공통점은 들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아주 맘에 드는’ 값비싼 가방을 갖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그런 예물 백을 맘에 안 드는 걸로 샀다니.

우울했다.


그때, 갑자기 현서의 핸드폰이 울렸다. 현서가 한숨을 푹 쉬고 전화를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네, 어머니. 안녕하세요.”

“현서야, 인테리어 업체 알아봤니?”

“네.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있어요.”

“이번 주 토요일 시간 괜찮니? 준호는 괜찮다고 하던데. 내가 동네 친한 아줌마한테 인테리어 업체 소개받았는데 한번 상담받아보자.”

“아.. 네.. 알겠습니다, 어머니.”

“그래. 그럼 토요일에 보는 걸로 하자.”


현서와 준호의 신혼집이 될 40평대 아파트는 준호 아버지 소유의 아파트이다. 이번에 준호가 결혼하면서 준호에게 증여해주기로 한 이 아파트는 구축 아파트인지라 많이 낡아서 리모델링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리모델링 비용은 현서네가 부담하기로 하였는데, 시어머니가 나서서 인테리어 업체까지 알아보고 연락을 준 것이었다.


현서는 나름대로 인테리어 관련 카페에도 가입하고 블로그도 찾아보며 인테리어 디자인과 업체를 물색 중이었으나 상담 정도야 여러 군데에서 받아봐도 괜찮으니 우선 토요일에 어머니가 소개받았다는 업체를 방문해보기로 했다. 준호와 둘이서 가거나, 엄마와 방문해서 상담을 받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할 것 같았지만 왠지 시어머니의 제안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지난번 예물 백 사건 이후로 시어머니가 굉장히 강경하고 고집이 있는 분이라는 걸 알게 된 후 자신도 모르게 시어머니에게 거부감을 갖게 된 것 같았지만,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고, 결혼 전부터 ‘찍히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고가의 집도 지원해주시는 입장이니 어찌 보면 당연히 그 집의 인테리어에 관심을 가지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난 결혼 후에 시부모님과 잘 지내고 싶은데. 고부갈등은 생각도 하기 싫어.

아마 나쁜 의도를 갖고 계시진 않을 거야. 오해하지 말자.

 

현서는 아무리 어려운 관계라지만 시부모님에게 먼저 선을 긋지 말고, 바쁜 자신을 대신해 인테리어 업체를 미리 알아봐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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