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직립보행을 못한다 해도 그렇지...
어느 부모님이 안 그러시겠냐마는 우리 부모님은 손주 사랑이 대단하시다.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던 날, 딸과 사위는 별일 없는지가 아니라 '우리 손주 빗소리나 천둥 번개 소리에 놀라지 않고 잘 있는지' 걱정되어 연락을 주셨다. (물론 나와 남편은 별일 없었지만 그래도 뭐랄까. 흠칫했다. 뭐, 딱히 섭섭하진 않았다.)
첫 손주이니 당연히 그러실 것이다.
그리고 아마 당신이 자녀를 키울 때에는 힘들고 정신없어 그냥 지나쳤던 순간들을 지금은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으로 온전히 '즐길 수 있으니' 사랑과 관심만이 가득한 것 같다.
또한 나이 육십이 넘어 딸의 아기 시절과 똑 닮은 아기를 보자니 삼십여 년 전 생각도 많이 나고,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아름다운 착각을 종종 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5개월에 접어든 우리 아기는 요즘 뒤집기와 되집기에 빠져서 뒹굴거리며 행동반경이 넓어지기 시작했는데, 아직 되집기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머리가 무거워서 바닥에 머리를 쿵 하고 찧기 시작했다.
그래서 최근에는 거실에 푹신한 매트를 깔고 가드를 쳐서 베이비룸을 만들어주었다.
아기는 베이비룸 안에서 자유롭게 뒹굴거리며 입으로 장난감 탐색도 하고, 옹알이도 하고, 낮잠도 잔다.
하루는 우리 집에 다녀가신 엄마가 전화를 주셨다.
"얘, 칠석이(아기 태명) 노는 매트가 좀 미끄러운 것 같던데, 이제 칠석이 기는 연습 하려면 매트 위에 이불 같은 걸 깔아주는 게 좋지 않겠니? 앞발, 뒷발을 움직이면서 앞으로 가는 연습을 해야 할 텐데 미끄러지면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걸?"
내 귀를 의심했다. 사실, 좀 당황했다.
우리 엄마가 그렇게 교양 없는 사람이 아닌데?
앞발, 뒷발?
지금 우리 아기에게 앞발과 뒷발이 있다고 말했다.
아무리 아직 직립보행을 못 하는 아기이고, 엎드려있고, 곧 기어 다닐 예정이라고 해도 그렇지. 앞발과 뒷발은 좀 심한 거 아닌가?
"엄마, 잠깐만. 앞발, 뒷발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아기에겐 두 손과 두 발이 있어. 앞발, 뒷발이라니? 너무한 거 아니야?"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격양되었고, 순간 엄마가 당황한 듯 전화 속에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네 발로 기어 다닌다는 거야 뭐야. 그래도 그렇지, 두 손과 두 발이지. 어떻게 앞발, 뒷발이라고 표현할 수가 있어?"
"야, 내 말은 그게 아니고... 푸하하하"
엄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의 설명을 들은 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럼 그렇지.
우리 엄마가 사랑스러운 손주의 '두 손'을 '앞발'이라고 표현했을 리 없지.
엄마의 설명에 왠지 모르게 안도하며 전화를 끊었다.
내 아들을 동물처럼 표현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기보다 혹시나 엄마가 연세를 드시면서 내가 모르는 낯선 모습을 장착하게 된 건 아닌지 내심 걱정이 되었었나 보다.
우리의 전화통화를 듣고 있었는지 매트 위에 누워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아기는 전화가 끝난 것을 확인하자 오른쪽 팔에 힘을 주고 온 몸을 일으켜 힘껏 뒤집었다.
그리곤 앞으로 나아가려는 듯 두 발을 버둥거렸다.
앞발... 뒷발...
푸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