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은행 다니는 직장여성 최민경입니다 14
오키나와에서 민경을 처음 만났을 땐 아무 감정이 없었다. 그냥 곤경에 빠진 한국사람 한 명 구제해준다는 생각뿐이었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그 정도야 당연히 도와줄 수 있으니. 한국에 와서도 다시 만날 일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밥 한번 먹자’는 인사야 으레 하는 말이니 의미도 두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실제로 민경이 연락을 해 오고, 같이 식사를 하기로 한 날, 나는 예상치 못하게 민경에게 커다란 호감을 느꼈다. 한눈에 반한 것 같다.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늦게 와서 매우 미안해하고 민망해했지만 토요일에도 일을 하다가 늦은 커리어 우먼으로써의 포스가 느껴져서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상대방이 누구이든 본인 일에 몰두하는 모습은 참으로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가! 본인 일에 자부심과 열정을 갖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민경과 함께라면 서로 성장하며 나이 들어갈 수 있는 이상적인 결혼생활이 가능할 것 같았다. 관심사도 비슷하고 대화도 잘 통해서 시간이 흐를수록 감정이 커져만 가서 비로소 나는 ‘이 사람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재테크와 돈 안 쓰고 모으는 것이 취미이자 특기인 자칭 ‘짠돌이’인 나는 가정경제와 자산증식을 위해서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맞벌이는 필수라고 생각해 왔는데(그치만 왠지 겉으로 말하면 눈총을 받는 것 같아서 생각만 하고있었다), 과거에 소개팅으로 만났던 여자들 대부분은 결혼 후 전업주부로서의 삶을 원했었다.
사실, 요즘 대부분의 직장인 남자들은 겉으로 표현은 못 해도 결혼 후 외벌이로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것에 대해 많이들 부담을 느끼고 있다.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는 여성들이 많고,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부담이 안 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우리 아버지 세대야 남자는 돈을 벌고 여자는 집안을 돌보는 외벌이가 당연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은 듯하다.
주변을 보면 여자들도 같은 교육을 받고,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면서 함께 벌어 조금 더 풍족하게 즐기면서 사는 삶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그리고 솔직한 말로, 남자들도 가끔은 회사 때려치우고 싶고(대부분이 실제로 그러진 못하지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 때가 있는데, 와이프가 벌이가 없으면 심적으로 기대기가 매우 어렵다. 나만 바라보며 의지하고 있는 가족들을 보고 있자면 농담이라도 회사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조차 꺼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나의 가치관과는 맞지 않았던 과거의 여성들과 달리 민경은 일을 계속하고 싶어 하고 커리어 욕심도 있다. 누군가는 적게 벌어 적게 쓰면 된다고들 얘기하지만, 민경은 더 벌어서 더 쓰거나 저축을 더 하면 되는데 왜 적게 벌 생각을 먼저 하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런 민경에게 고마운 마음도 들고, 나와 가치관이 비슷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서 결혼 후에 집안일이나 육아로 일을 그만두고 경력단절이 되지 않도록 외조를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민경은 결혼 전부터 살림에 자신 없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었다. 특히 다림질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를 장황하게 말할 때에는 웃음이 나왔다. 그게 뭐가 어렵다는 거지? 왜 민경이 살림에 대해 부담을 느끼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민경이나 나나 부모님의 살뜰한 보살핌 아래 학교 다니면서 공부하고, 취업 준비하고, 취업해서는 부모님 댁에 살며 직장을 다녔는데, 다시 말해 우리 둘 다 집안일을 배우거나 전담해본 적이 없고, 민경에게 집안일을 잘해야 한다고 누가 부담을 준 것도 아닌데 민경은 왜 마치 본인이 잘해야 하는데 못 해서 송구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걸까?
가만 생각해보니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도 남자들에게는 선택의 여지조차 없이 결혼 후에도 반드시 일을 해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을 지우고, 여자들에게는 일을 하거나 전업주부가 될 수도 있다는 선택지가 있다고 생각하게끔 하는 것 같다. 이것이 여자들이 살림을 더 잘할 것이라고 기대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아마 민경도 이런 ‘통상적인 기대’가 버거워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겠지.
왜 결혼을 하면 남자가 일을 그만두고 살림을 하는 일은 없는 걸까? 둘 다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여의치 않으면 남자든 여자든 둘 중 한 명이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될 수는 있는데, 어느 누가 업무적으로 더 뛰어나다거나 살림에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준 적이 없는데 왜 사회는 남녀에게 각자 역할의 프레임을 씌우는 걸까? 그냥 옛날부터 그래왔으니까?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는데.
요즘에 드는 생각인데, 솔직히 나는 경제적 자유만 이루면 회사는 당장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재테크에 집중하며 살림을 전담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회사 일도 나쁘진 않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 개인의 발전보다는 회사를 위해 일하는 것에 회의감이 들 때가 많다. 이럴 바에야 내가 성장하면서 수익창출을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은 생각이 종종 드는데, 민경은 은행을 계속 다니고 싶어 하니 내가 집에서 서포트를 잘해주면 되고, 나중에 자녀가 생기면 육아를 하기에도 좋은 환경이 될 것 같다.
민경과 결혼해서 살아보니 확실히 민경보다는 오히려 내가 집안일을 더 꼼꼼히 잘 챙기는 것 같다. 민경은 일 하면서 성과를 낼 때 더욱 생기가 돌고 활기차 보인다. 가끔 야근하고 피곤에 절어 집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져서 잠이 들더라도 결국 좋은 결과가 나오면 눈을 빛내며 나에게 얘기해주곤 하는데, 그 모습이 참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워서 커리어를 쌓을 수 있게끔 옆에서 많이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살림 좀 못 하면 어떠리. 더군다나 내가 체력적으로 더 유리한데, 둘 중 잘하는 사람이 더 챙기면 되는 거지.
(문득, 민경이 빨래를 바로 치우지 않아도 잔소리하지 말아야지 싶지만 막상 빳빳하게 마른 채 며칠간 빨랫대에 매달려있는 옷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잔소리가 나온다. 그거 그냥 눈에 보이면 바로 치우면 안되나? 이건 딱히 어려운 것도 아닌데.)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하고, 이해하면서 맞춰가는 게 바로 결혼생활 아닐까. 서로 할 수 있는 부분에서 더욱 잘하려고 하면 그것이야 말로 이상적인 가정을 이루게 되는 방법이 아닐까.
내가 잘하는 만큼, 상대방도 잘하면 되는데 부부사이에 칼같이 자르고, 니 거 내 거 따지면서 계산기 두드리기 시작하면 아무런 득 없이 감정만 상하게 되는 것 같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