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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경단 Jan 12. 2023

내가 풀때기를 먹게 된 건 네 덕분이야

P은행 다니는 직장여성 최민경입니다 15

가끔 농담처럼 나중에 내가 전업주부 하겠다고 이야기를 하면 민경은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쿨하게 ‘그러던지’라고 한다. (아마 내가 당장 그러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경제적 자유를 달성하기엔 갈 길이 멀기에 이것은 당분간 나의 꿈으로만 남을 것 같다.


민경이 다른 집안일엔 서툴러도 심혈을 기울여하는 부분이 하나 있다. 바로 요리다.

나는 금요일 밤이 제일 좋다. 아마 모든 직장인들이 그렇겠지만 내가 금요일 밤을 더욱 좋아하는 이유는 토요일에 민경이가 어떤 아침을 준비해 줄지 기대가 되기 때문이다. 여행 가서 근사한 호텔 조식을 먹기 전의 설렘 같은 것과 비슷하다. 평일엔 둘 다 시간이 없어 늘 간단하게 먹고 출근하지만 주말 아침만은 정성을 다해 멋들어진 한 상을 차려주어 행복한 주말을 시작하게 해 준다.


민경은 요리를 도맡기로 한 후, 유튜브를 찾아보고 여러 레시피도 검색해 보면서 다양한 음식을 시도하여 나를 감동시킨다. 심지어 스크램블 에그-그냥 계란 풀어서 휘젓다가 익히면 되는 거 아닌가?-를 만들기 위해 고든 램지의 영상을 찾아보는 모습을 보며 요리에 진심을 다한다는 걸 알았다.


팬케이크와 샐러드, 야채수프와 빵, 클럽 샌드위치, 직접 만든 통밀 머핀과 과일, 아보카도 토스트, 시금치 콘 수프, 에그 인 헬... 민경이 해 준 음식은 맛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살면서 처음 들어보고 먹어보는 음식도 있었지만 꽤나 맛있었다. 거진 30년 넘는 기간 동안 먹어보지 않은 새로운 맛을 느껴본다는 것은 상당히 재미있고 설레는 일이다.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피자와 햄버거였다. 주로 고기 위주의 식사를 해 왔고, 주변의 또래 남자들을 보면 대부분 비슷한 식성을 갖고 있었기에 문제의식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건강검진 결과표에 빨간색 글씨가 점점 늘어났고, 의사 소견란이 빼곡히 채워지기 시작했다. 높은 콜레스테롤, 지방간, 혈압 상승, 비만도 증가… 그동안 즐겨 먹은 음식이 건강식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몸을 해롭게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해서 당황스러웠다. 슬쩍 보니 옆에서 건강검진 결과표를 함께 보던 민경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그날 이후로, 민경은 식단 관리에 들어갔다. 아침은 간단히 때우고, 점심은 회사 사내식당이나 밖에서 (주로 육류 위주로) 먹으니 저녁만큼은 채소 위주의 건강한 식사를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풀때기라면 질색이었지만 이젠 건강 관리를 할 나이가 되었다는 생각에 우울해져서 할 수 없이 동의했다.


민경은 서점에서 건강 요리법이 담긴 요리책을 몇 권 사 오더니 다양한 야채와 해산물로 식사를 준비했다. 부엌 찬장은 다양한 향신료와 양념으로 채워졌고, 아보카도 새싹 비빔밥, 미소 고등어조림, 벨기에식 홍합찜, 월남쌈, 연어구이와 낫또밥, 가지덮밥, 두부조림, 각종 나물 무침, 그리고 가끔 고기류를 먹을 땐 반드시 생채소 샐러드를 곁들이는 등 식단에 신경을 쓰는 것이 눈에 보였다. 매운 것을 잘 못 먹는 나를 배려해 간을 맞춰주는 것도 고마웠다. 누군가 나의 건강을 위해 이렇게 애써준다는 것이 감격스러웠고, 심지어 맛까지 좋아서 나는 채소를 좋아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부모님도 포기했던 나의 식습관이 민경이 덕분에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을 아시면 아마 아주 기뻐하실 것 같다.


그래, 아직 우리 부모님을 어려워하는 민경이 칭찬을 크게 해 주고 이번 기회에 중간역할 좀 잘해서 민경이랑 부모님이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해봐야겠다.


오랜만에 본가에 부모님과 식사를 하러 간 날, 어머니는 아들의 입맛을 저격한 불고기와 소시지볶음을 내어 주셨는데, 나도 이젠 민경이 덕분에 야채도 잘 먹는다는 걸 꼭 알려드리고 싶다.


“오~ 요즘 집에서 민경이가 맨날 풀때기만 줘서 풀때기만 먹었었는데 소시지는 오랜만이네~”


옆에 앉아있던 민경의 표정이 살짝 뒤틀리면서 얼굴이 벌게진다. 그리곤 어머니 아버지의 눈치를 살핀다.


“자기야, 언제 우리가 풀만 먹었어..?”


평소의 민경이 목소리와는 다르게 살짝 떨림이 있다. 크게 당황한 듯한 목소리인데 나는 그동안 먹지도 않던 야채를 이제는 잘 먹는다는 이야기를 위트 있게 하고 싶었는데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분위기다.


며칠 후, 처갓댁으로 식사를 하러 갔다. 육류를 좋아하는 사위를 위해 장모님이 밀푀유 나베를 준비해 주셨다. 야채와 고기를 함께 먹을 수 있는 담백한 건강식단!

고기 한 점과 익은 알배추 한 조각을 조심스레 집어 한 술 뜨려는 찰나, 민경이 입을 연다.


“엄마, 글쎄 얼마 전에 시부모님이랑 식사를 하러 갔는데, 재훈 씨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내가 집에서 풀때기만 줘서 풀때기만 먹는다고 얘기를 하더라고. 매일은 아니어도 고기도 먹고 해산물도 섞어서 골고루 건강하게 신경 써서 먹고 있는데 재훈 씨가 그렇게 얘기해서 내가 엄청 당황했잖아. 왜 그렇게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어. 시부모님이 나 때문에 아들이 밥 제대로 못 챙겨 먹는다고 오해하시면 어떡해?”


갑자기 귀까지 빨개지는 것이 느껴진다. 민경은 갑자기 왜 이 이야기를 하는 거지?

민경을 슬쩍 보니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날 바라보고 있다. 나도 모르게 장모님과 장인어른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약 2초간의 어색한 정적이 흐른 후, 처제가 분위기를 만회해 보려는 듯 큰 소리로 말한다.


“언니, 형부랑 고기 좀 많이 먹어~ 얼마나 풀때기만 먹었으면 형부가 그러셨겠어~”

“고기 먹는다니까. 근데 건강 생각해서 야채요리를 좀 했더니 그걸 글쎄 시부모님 앞에서 내가 풀때기만 준다고 하더라고. 왜 그렇게 말을 하지? 진짜 당황스러웠어.”


나를 가운데에 두고 자매가 목소리를 높인다.

아, 정말 민망하다. 밀푀유 나베는 보글보글 익어가는데 한 점도 뜨지를 못하겠다.


“골고루 먹는 게 좋지. 너무 편중된 식사도 좋진 않아. 우리 사위 오늘 고기 많이 먹고 가~”


장모님이 소고기 한 국자를 듬뿍 떠서 내 앞에 놔주신다. 오늘처럼 고기 맛이 안 느껴지는 식사는 처음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민경이 먼저 말을 건다.

“기분이 어땠어?”

“뭐가?”

“아까, 풀때기 얘기 말이야. 내가 지난번에 느낀 기분을 좀 알겠어?”


할 말이 없다.


“역시,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니까. 자기 의도가 무엇이었든, 말을 좀 가려서 할 필요가 있겠어. 괜히 불필요한 오해는 불러일으키지 않았으면 해.”


어줍지 않게 뭔가를 해보려다가 큰 실수를 한 것 같다. 중간역할을 잘한다는 건 대체 무엇일까. 아직도 난 갈 길이 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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