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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틴팍 Nov 23. 2023

'The Good Enough Job'이란 존재하는가?

# '내'가 '내 직업'으로만 설명되는 사회에서 살기란.

최근에 "The Good Enough Job"이란 책을 봤다. 디자인회사, 광고회사 등에서 수년간 직장생활을 한 Simone Stolzoff란 작가가 '충분히 좋은 직업'이란 무엇인가를 테마로 여러 명의 미국 직장인들(대부분 지금은 그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한다.)을 인터뷰하고 그를 토대로 본인의 의견을 펴 낸 책이다. *미국 농부 김선우 님이 페이스북에 소개하는 포스팅을 남겨서 보게 되었는데, (이분에 대한 소개는 나중에 차차 하기로 한다. 나의 미국 생활에 이런저런 많은 영감을 주시는 분이다.) 18년 정도 한 직장을 쭈욱 다니다가 얼마 전 퇴사하게 된 나에게도 많이 공감 가는 부분들이 많았다.

미국인들은 상당히 '직업=나'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슬픈 외국어'에도 비슷한 사례가 나오는데, 하루키가 부인과 함께 미국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의 부인을 소개하면서 난처해하는 장면이었다. "하루키 씨 부인은 그럼 뭐 하세요?"라는 질문에 "그냥 집에 있어요"라는 대답이 미국인들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만큼 미국에서는 내가 하는 '일'이 '나'를 대변해 주고, '나'와 동일시된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이름을 소개하고, 그다음에는 응당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설명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다음 대화로의 연결은 상당히 난처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에 와서 나도 제대로 된 '직업'이 없으면서 비슷한 경험을 자주 하곤 했다.


이는 한국도 미국 못지않은 부분이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가 훨씬 더 심한 부분도 있다. 나는 인간 박경민 보다는 00 회사 팀장,  00 회사 엔지니어 등 내가 가진 직업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은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보니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00에 다니고 있습니다. 직군은 00입니다." 한마디면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특히나 몇 년생인지, 고향이 어디인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어느 동네에 사는지(심지어 자가인지, 전세인지) 철저히 '분류'하기 좋아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나를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내 '직업'인 것이다.


책에서는 '번아웃'에 대한 케이스, '가족 같은 회사 분위기'를 강요하던 한 회사의 이야기, '노조'에 대한 이야기, 믿고 따랐던 '멘토'에게 배신당하는 케이스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소개되는데, 하나하나 엄청 와닿는 이야기들이었다. 어찌 보면 '똑같은 사례들을 한국에서도 언제 어디서든지 찾아볼 수 있겠는 걸?' 하는 생각도 들었고, 위에 언급한 몇 가지 사례들을 나도 직접 경험하기도 하였다. 한 8~9년 전쯤인가, 회사 일로 속상해서 울고 있는 한 후배에게 해줬던 얘기가 문득 생각난다.

"00야 회사는 니 인생이 아니야. 때로는 적당히 거리 두기를 할 필요가 있어"

당시만 해도 요즘 흔히 말하는 MZ세대의 오피스 문화가 있던 시대도 아니었는데, 나도 왜 저런 조언을 해주었는지 놀랍기도 하다. 나도 그 당시 일종의 '번아웃'을 경험하면서 나 스스로 '적당히 거리두기'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주말도 없이 주 70시간 이상 일했던 시절이었다.)


책의 결론은 예상했듯이, 더 이상 '나'를 내가 하는 '일'과 동일시하지 말라는 것, 그리고 '나'를 대표하는 무언가 '나만의 가치'를 찾아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테니스를 좋아하고, 낚시를 좋아하고 별자리 관찰을 즐기는 나' 같은 그런 것 말이다. 책에 나온 두 가지 타입에 대한 소개도 상당히 흥미로웠는데 사람은 보통 두 가지로 나뉜다는 것이다. 하나는 일을 자기 일상생활에 믹스하는 타입(나도 여기에 속하기도 하는데, 퇴근 후에도 회사 메일도 열어보고, 통화도 하고, 자기 전에 잠깐 일 생각도 하는)과 하나는 일과 생활을 철저히 분리하는 타입이다.(요즘은 사회 분위기가 이 쪽에 속한다.) 무엇이 더 낫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나를 내가 하는 '일'로 대표하는 삶이란 참 별로 일 수 있겠다 싶다. 물론 나 또한 한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라 당분간은 확 바뀌는 건 어렵겠지만..


*미국농부 김선우님 : 동아일보 기자 생활 중 번아웃을 느끼고, 당시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위해 떨어져 있던 가족들과 합류한다. 지금은 시애틀 북부 외진 마을에서 마을 수영장에서 구조요원으로 일하면서, '더 밀크' 등 여러 미디어에 글을 쓰는 기자,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주요 저서 <40세에 은퇴하다>, <지속가능한 삶을 모색하는 사피엔스를 위한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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