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대한민국! 새로운 국민의 나라’라는 슬로건으로 제20대 대통령이 취임했지만, 온 나라는 갈등과 분열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대통령은 취임 첫날부터 '아방궁'이라 불렸던 청와대를 국민들에게 개방했고, 살던 아파트에서 출퇴근하는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247,077표, 0.73% 차이로 역대 대통령 선거 사상 최소 득표율 격차로 당선된 대통령을 거부하는 반대 여론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국회의원들의 진영싸움으로 서민들을 위한 법안은 토론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폐기되었고, 도심 곳곳에서는 이념대립으로 대학민국은 그야말로 달구어진 시한폭탄 갔았다.
하빈이가 언니와 심하게 다투고 집을 나간 지 두어 달이 되었고, 언니는 시어른들에게 하빈이 가출을 숨기고 있었다. 하빈이를 언니 대신 키운 엄마는 몸은 영미네 있었지만, 온통 하빈이 걱정으로 노심초사했다.
“한국에 제대로 된 친구 하나도 없는데, 애가 어디 갔을까?”
“나이가 스물이 넘었는데 혼자 시간 보내다, 생각 정리되면 돌아올 거야. 조금만 기다려 봐.”
“애를 낳고 키워봤어야, 어미 심정을 알지? 네 언니는 물 한 모금 못 삼키고 있을 게다. 이 녀석 엄마하고 하루 이틀 싸운 것도 아닌데, 집을 왜 나가.... 어디 가서 밥은 먹고 다니는지...”
“자식 안 낳고, 안 키워봤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거야, 언니가 오죽 애를 무시하고 몰아세웠으면 애가 못 견디고 나갔겠어?”
“네 언니가 너처럼 무식하게 큰 소리를 내냐? 때리기를 하냐?”
“차라리 엄마처럼 무식한 게 나아, 모르니까 하는 소리라고 여기지. 언니 표정 변화 없이 지 할 말만 하는 나지막한 목소리는 허용이라는 게 없는, 가둬놓고 손 안 대고 사람 죽이는 일산화탄소 같다니까.”
“아이고, 지 보다 한참 위인 언니한테 하는 말뽄새 하고는...”
“어릴 때야 언니하고 터울이 워낙 나니까 참고 살았지. 지금이야 지나 나나 같이 늙어 가는데... 내가 겁날 게 뭐 있어.”
나도 사실 좀 걱정은 되었지만, 이십 대 건장한 청년인 하빈이가 일탈의 시간을 통해 깨닫고 뭔가 얻는 시간이 되길, 별 탈 없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것 말고는 딱히 방법이 없었다.
승천이는 아버지처럼 산골 땅도 쓰러질 것 같은 농가도 아닌, 경기도 시골 마을에 마당이 널찍한 집과 넓은 평지 장기 임대했다. 비용을 드려 최첨단 시설을 갖춰갈 때쯤, 승천이 사업에 비전이 있다고 여긴 두 명의 친구가 투자와 합류를 결정했다. 승천이가 절반 이상의 지분을, 나머지를 두 친구가 지분으로 가진 회사가 설립되었고, 승천이는 자기 계획대로 귀농해, 두 명의 동업자와 약초 식물 재배에 몰두하느라 분주하게 보내고 있었다. 엄마와 영미, 나는 승천이에게 대도록 간섭으로 느낄만한 언행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승천이에게 전화가 왔다.
“작은누나, 하빈이 여기 와 있어.”
“진짜야? 언제 왔어?”
“좀 됐는데, 큰누나한테 말하지 말라고 해서 그냥 있었어. 작은누나한테는 귀띔해 줘야 할 것 같아서”
“걔는, 진짜... 온 식구들이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데, 엄마 대신 자기 키워준 외할머니 생각도 해야지. 어디 있었대?”
“연락 와서 갔더니, 지하철역 근처에 있는 파출소더라고.”
“파출소? 무슨 일 있었대?”
“몸 상할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집에서 나올 때 주머니에 있었던 얼마 안 되는 돈 떨어지고, 노숙자들한테 입고 있던 옷하고 핸드폰까지 다 뺏겼더라고. 파출소 경찰 핸드폰으로 우리 농장 검색해서 농장 전화로 연락 왔었어.”
“아휴, 참, 상황이 어떻든 할머니 하고 어른들 최소한의 걱정은 하지 않게 해야지.”
“내 생각도 작은누나하고 다르지 않은데, 이 녀석이 큰누나한테 연락하면 우리 농장에서도 나가겠다잖아. 어떻게 하면 좋겠어?”
“일단, 승천아, 그 녀석 농장에서 붙잡고 있어, 내가 큰 언니하고 엄마 분위기 좀 살펴보고 연락해 주게.”
“그래 누나”
“승천아, 일도 정신없을 텐데... 그 녀석까지 신경 쓰게 하네….”
“하빈이가 나한테 연락해 와서 좀 당황스러웠는데, 은근히 좋더라고. 솔직하게 하빈이 미국에서 사느라 우리하고 교제가 많지도 않았잖아. 그래도 삼촌이라고, 이런 게 핏줄이구나 했어.”
하은이 하빈이는 영미와 내게 가끔 크리스마스카드 정도는 보내주었었다. 엄마의 지도가 있었다기보다는 미국 크리스마스 문화의 영향이었다. 할머니에게 삼촌에 대한 정보를 물은 적도 없지만,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삼촌의 존재가 두 이모와는 좀 다르다는 것을 인지했을 것이다. 그런 하빈이가 삼촌에게 연락했다는 것은 엄마가 삼촌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고,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예감은 아무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되었다.
”하빈이가 생각보다 아는 것도 많고, 자료 찾고 할 때 영문 자료는 내가 좀 딸리는데, 하빈이가 도와줘서 도움이 돼, 하빈이 여기 있는 건 내가 아르바이트비를 줘야 할 판이야. 근데, 큰누나 우리한테 표현은 안 해도, 얼마나 속 끓고 있겠어.”
“엄마 말로는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못 먹을 거라고 하는데, 너도 알겠지만, 큰누나가 오죽했으면, 한 번도 가출해 본 적 없는 애가, 한국 지리도 모르는 하빈이가 그랬겠냐? 아무튼 네가 잘 좀 데리고 있어 줘. 일은 계획대로 잘 돼 가니?”
“응, 학교 때 교수님들 산림청 연구소 선배님들에게 조언 구하면서 지금까지는 내 생각대로 가고 있어.”
“그래, 항상 응원하고 있어.”
“하빈이 여기서 잘 데리고 있을 테니까, 상황 보고 연락 줘.”
“알았어.”
나는 엄마에게 말하면, 무턱대고 하빈이를 찾아갈 것 같아, 엄마에게는 아무 말하지 않고, 하빈이 일로 언니와 마주 앉았다.
“언니, 하빈이 어디 있는지 아는데, 말해줘?”
하빈이가 승천이에게 가 있다고 말하자, 언니는 한참을 울기만 했다. 그리고 승천이에게 찾아가지 않을 테니, 다른 곳에 가지 못하게 데리고 있어 달라고 했다. 나는 언니 눈물을 아버지 돌아가신 날 밤에 보고 두 번째로 봤다. 언니 눈물을 생각하면서 문득 내가 언니보다 참 이기적인 성향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나 자신을 향한 분노로 나 자신을 향해 울었던 적은 많았지만, 누구를 위해 누구로 인해 울었던 적은 없었다. 엄마는 언니가 아버지 제사 때마다 혼자 운다고 했고, 하빈이 때문에 무수한 눈물을 흘린다고도 했다. 나는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아버지 살아 있을 때, 아버지 일하는 산골 집에 한번 가 보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가, 돌아가신 아버지 보지도 못하는데 울기는 왜 우냐고 했었다. 자식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안 되니까, 우는 게 아니냐며? 언니 눈물에 얽힌 감정을 공감하고 싶지 않았었다. 자식뿐 아니라 세상에 자기 뜻대로 되는 게 없다는 것을 그 나이가 돼서 안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며 말을 옮기는 엄마를 타박했었다.
“용남아, 하은이는 어떤 일이 생기면 형부나 내 성격을 생각하면 예측 가능한데, 하빈이는 정말 외계에서 온 아이 같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어.”
“언니 그런 인식부터가 잘못된 거 아니야? 사람이 얼마나 지능적인 동물인데, 통제하고 억압할수록 벗어날 궁리만 하게 되고, 어떤 존재로부터 자기 자신이 저능아 취급당하고 다뤄지고 있다고 느끼면, 그 상황을 피하고 모면하고 싶은 게 사람이야.”
“네 말대로 내가 그런 엄마라 치고. 그럼, 하은이한테는 내가 다른 모습이었겠니?”
“하은이가 언니 뜻대로 되는 것 같겠지만, 부모 뜻보다 자기 욕구가 끌고 간 인생이야. 언니도 그랬잖아? 엄마 아버지 때문에 간 인생 아니잖아? 언니는 누구보다 자기를 모든 것으로부터 성공해 내고 싶었던 욕구가 앞섰던 사람이잖아. 언니 성공에 엄마, 아버지 희생과 공부 못하는 동생 수고 같은 것을 고려하면서 갔던 인생 아니잖아? 언니 그 욕구가 다행히 엄마, 아버지에게 어떤 쪽으로든 보상된 것뿐이지. 언니 마음에 드는 자식은 언니와 형부를 닮은 애고, 언니 뜻대로 안 되는 자식은 부정하고 싶어? 하빈이가 하은이와 다르다는 것부터 인정하고, 하빈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을 때까지 여유를 갖고 좀 기다려 주면 안 돼?”
언니는 말없이 앞에 놓인 찻잔을 응시하다, 얼굴을 숙인 채 말을 다시 시작했다.
“용남아, 네 눈에는 내가 그렇구나. 너는 대구 어른댁 생각 잘 안 나지?”
아버지는 대구 어른댁 인사 가는 일을 의무인 듯 1년에 한 번씩 갔었다. 어딜 가든 나를 데리고 다녔던 아버지는 대구 어른댁에 갈 때만큼은 언니를 앞세웠었다. 나는 삶은 달걀과 사이다를 마시며 기차를 타고 싶었고, 대구 도시가 보고 싶어 따라가겠다고 떼를 부리곤 했지만, 엄마 꾸지람에 늘 주저앉아야 했었다.
“아버지는 언니 자랑하고 싶어서 언니만 데리고 갔었잖아. 어린 마음에 상처를 얼마나 받았다고.”
“나는 아버지 하고 어른댁에 갈 때마다 가기 싫었어. 그래, 네 말대로 내가 아버지 자랑이었을지도 모르지... 그치만, 내가 본 아버지는 어른댁 더부살이 머슴 이상은 아니더라. 내가 그런 아버지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겠어? 무슨 마음으로 살았겠어?”
언니는 아버지가 대구 어른댁 대문을 넘는 순간, 대대로 머슴 살던 머슴이 주인의 은혜로 면천받아 세상서 살다, 때가 되면 주인을 찾듯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상했다고 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언니는 그 어른을 능가하는 한의사가 되어, 조아리고 있는 아버지의 굽은 허리를 펴게 만들어 그 어른과 동등한 위치에서 그 어른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고 했다. 조아리는 아버지 옆에서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와 같이 조아리고 있는 자기에게도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고...
“나는 용남이 네가 참 부러웠다.”
“내가? 장난해?”
“진심이야. 내가 어른댁 다니면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 같은 거 할 여유가 없었어. 굴욕을 참아내는 아버지를 보면서 아버지 꿈을 이뤄줘야 했고, 너를 포함해 온 식구가 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보면서 내게 자유는 없었어. 그냥, 앞만 보고 가야 했었어.”
“내가 이 집에서 어떤 희생을 강요받고 있다는 거 언니는 알고 있었다는 거지?”
알았으면서 나를 무시했던 언니를 생각하니 갑자기 열이 확 올라왔지만, 그냥 언니 말을 경청했다.
“다행히 그렇게 왔던 길이 내 적성에도 맞았던 것도 같고, 지나고 보니 네 말대로 내 욕구에 부합했던 것도 사실인 것 같다. 다만, 늘 어떤 무게에 눌려 사는 기분이었어. 너는 최소한 정해진 운명 같은 무게에 눌려 있지는 않았잖아. 아버지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 하고, 떼도 부리고, 안 해도 되고 가지 않아도 되는 너를 보면서 내게는 부여되지 않은 자유로움이 허락된 것 같더라. 하은이 하빈이를 내 뜻대로 만들고 싶다기보다는,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길 바랐을 뿐이야. 하빈이가 환경 운동에 관심 있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세상에서 사회에서 허용하는 테두리 안에서 자기 꿈을 만들어 갔으면 했어.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미래 환경과 사회 활동에 관한 공부를 좀 해서 영리한 환경 운동가가 되었으면 했어.”
“그러면, 하빈이와 그런 대화를 했었어야지? 무턱대고 반대만 했잖아?”
“너, 나하고 대화해 볼 생각 해 봤어? 어릴 때부터 너는 내가 부르면 도망갈 생각만 했지? 어쩔 수 없이 마주 앉아도 내 말은 들어보지도 않으려 했잖아.”
“그거야, 항상 언니가 나를 무시하는 말만 했으니까.”
“하빈이가 너 같이 굴어. 내 말투든, 표현이든 네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지만, 정확한 자기 의사 표현을 해 줘야. 대화가 되지.”
“언니는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언어 중에 지식에 바탕이 된 입술의 표현만 있다고 생각하지?”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적당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언니가 애들 임신했을 때, 갑자기 먹고 싶은 음식이 있어서, 형부한테 사 달라고 했던 적 있을 거야. 그때 형부가 왜 그게 먹고 싶냐고 논리적으로 설명해 봐. 하면 언니는 뭐라고 대답할 거야?”
“배 속에 아기가 먹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대답하면 되지.”
“뱃속 애가 먹고 싶은 건지? 언니가 먹고 싶은 건이 명확하게 맞아? 그렇게 형부가 사 오면 언니 맛있게 먹은 적 몇 번이나 돼? 잘 먹힐 때도 있지만, 먹고 싶은데, 먹히지 않을 때도 있고, 다른 음식이 떠 오를 때도 있었잖아?”
“그렇지.”
“그때 형부가 사 왔는데, 왜 안 먹냐고? 다그치면 언니 어떻게 하겠어?”
“다음부터는 형부한테 말하기 전에 좀 더 생각해 보겠지.”
“사람이 입술로 표현하는 것은 극히 일부야. 사람에게는 설명이 안 되는 욕구도 많고, 살다 보면, 논리적으로 정의 내릴 수 없는 현실도 많아. 하빈이가 환경운동에 관심이 있다고 해서, 미래 환경보호에 관한 관심인지? 사회 운동에 관한 관심인지? 지구 온난화에 관한 관심인지? 스스로 명확하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을 수도 있잖아. 여기저기 관심을 가져보고 어떤 것이 자기를 이끌어 가는지 확인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런데 언니는 자유로운 경험이 아닌, 세상에서 만들어 놓은 울타리 안에서 찾길 바라고, 그것을 계획해서 설명하라고 하니, 하빈이가 그게 되겠어?”
나는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도,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책을 읽었음에도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산다. 하물며 겨우 스무 살을 넘긴 하빈이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간다면, 그것이 내 시선에서는 이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냥 한길만을 바라보고 가는 언니나, 큰 조카 하은이 같은 사람들이 부러우면서도 진정으로 언니도 하은이도 정말 원해서 가는 삶일까? 의구심을 가졌었다.
“그렇다고, 학교를 불성실하게 다니고, 해외에 나가 명화 테러를 하고, 가출을 하고... 그런 행동을 방치할 수는 없잖니?”
“하빈이가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해?”
“알면서 그런 행동을 하니, 더 화가 나는 거야.”
“언니에게는 참 힘든 일이겠지만, 사람의 언행을 판단할 때,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보지 말고, 이면에 있는 그 사람의 마음을 좀 헤아려 주는 연습을 좀 해 봐. 하빈이가 그런 행동을 하기 전까지 여러 형태로 자기표현을 했을 거야. 엄마만큼 자기 자식을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언니가 원하는 식의 표현과 행동으로 표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언니가 아들을 제대로 알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봤으면 해.”
내가 중3 여름방학 때 산골 동네 농고에 가라는 아버지, 엄마 말을 어기고 일반고에 갔을 때, 또 깊은 고민 없이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아버지 엄마는 내 선택에 더는 말하지 않았었다. 나는 아버지 엄마가 내게 져 준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자식을 낳아 길러보지 않았지만, 부모라는 어른은 좀 더 성숙한 어른이 미숙한 아이에게 강요보다는 져 주는 포용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남아, 나는 항상 내가 너보다 어른이라고 생각했어. 솔직히 친정 식구들 늘 부담스러웠어. 승천이는 호적에 올라 있는 동생이긴 하지만, 정(情)이 가진 않더라고…. 내가 내 갈 길 갈 때, 여러 가지를 포기하고 소리 없이 보이지 않게, 그 자리에서 수고해 줘서 고마웠다. 지금은 이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너 같은 여동생이 있어서, 하빈이가 찾아갈 삼촌이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의지가 되고 위안이 된다. 승천이한테 고맙다고 전해줘.”
언니는 언제나 내가 더는 할 말을 못 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 내가 내 불평을 더 늘어놓을 수 없게 말하는 언니는 여전히 얄밉다.
하빈이는 다행히 승천이를 도우며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승천이는 두 친구와 멋스럽게 개조한 농촌집에서 같이 살면서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해 왔다.
“엄마, 막내 누나 집에 언제까지 있어야 해요? 내가 월급 드릴 테니까, 여기 와서 우리 밥 좀 해 주시면 안 돼요?”
“무슨 월급은 월급이야. 남자 셋이 밥 해 먹고 일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지? 알았다. 우리 아들 열심히 일하는데, 내가 밥이라도 해 줘야지. 막내 누나한테 이야기하고 가마.”
엄마는 솔직히 하빈이도 없는 언니네 집에서 할 일 없이 있는 것도 편치 않았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영미 어린 딸을 돌보는 것도 영미가 충분히 할 수 있었지만, 엄마가 딱히 지낼만한 곳이 없어 영미가 엄마에게 배려하고 있었다. 승천이 속마음은 들은 바 없지만, 엄마의 그런 처지를 알고, 승천이가 엄마에게 어떤 일이라도 주고 싶어 요청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엄마, 좋겠어? 나보다 낫네. 나이 칠십에 월급 받는 직장인이야?”
“월급 말고 용돈 정도만 주면 된다고 했는데, 회사 일하는 사람으로 신고했기 때문에 월급도 주고 세금도 내야 된다네.”
엄마는 언니네 집 살림을 살아 줄 때는 세금 신고 없이 그냥 언니에게 고정적으로 얼마의 돈을 받았었다. 아마도 언니 병원 본인 월급에서 얼마의 돈을 엄마에게 주지 않았나 싶다. 승천이는 엄마를 자기 회사 직원으로 올리고 일정한 급여를 받게 하고 세금 신고까지 하도록 했다.
“내가 와 보니까, 옛날 네 아버지 때하고는 차원이 다르더라, 최첨단으로 시설 공사가 돼 있어서 깨끗하고 얼마나 좋은지 몰라. 승천이 하고 다들 하얀 가운 입고 무슨 연구소 박사님들처럼 일한다니까, 집도 시골집을 현대식으로 공사를 다 해서 새집에서 사는 기분이야.”
“엄마 좋아하니까, 좋네.”
“용남아, 친구 집에 그러고 있지 말고, 엄마가 조금 모아둔 돈 줄 테니까, 보태서 원룸이라도 얻어서 나와 살아.”
“엄마가 무슨 돈이 있어?”
“엄마가 이럴 때는 날름 받아라. 지 언니처럼 제 갈 길만 가던지? 영미처럼 지 살길만 찾던지? 그래 오래 직장 생활했으면서 동생들 몰래 네 살 궁리 하나 못하고... 어이구 등신. 용남아, 네가 잘 견뎌줘서 엄마가 의지가 많이 됐다. 네 형부하고 재부가 한 번씩 주는 용돈 모아둔 거라 많지는 않다마는... 너 줄 테니까 알아봐. 너는 동생 사업 시작한 지 2년이 다 되어 가는데, 한 번 안 와보냐?”
나는 승천이 일터에 가 보는 것이 두려웠다, 아버지와 다투고 발길을 끊었던 사춘기 어린 용남이가 자꾸 떠 올랐고, 아버지의 꿈이 타버린 어둠을 대면한 그날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또 그 어둠 속에서 짐 가방을 들고 사라지는 승천이 부모님을 붙잡지 않은 나를 본다.
“작은누나, 이번 주말에 큰누나 데리고 여기 놀러 와, 우리 농장 식구들하고 바비큐 할 건데, 막내 누나한테는 이야기했는데, 큰누나한테는 작은누나가 이야기하고 같이 와.”
“하빈이는 뭐래? 엄마 볼 수 있겠대?”
“하빈이는 엄마가 자기 보기 싫은 거지, 자기는 괜찮아졌다는데….”
“그래? 큰언니에게 연락해 보고, 가겠다면 같이 가고, 싫다면 나 혼자 갈게.”
언니는 하빈이 밝아진 모습을 보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듯했고, 하빈이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엄마 아빠에게 농장을 구경시켜 주며 신나 했었다. 언니는 하빈이가 식물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그렇게 많은지 미처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형부는 승천이에게 병원에 쓸 약재를 선주문하고, 병원 곳곳에 둘 약초꽃을 미리 예약 주문해 주었다. 나는 승천이가 잘 가꾸어 놓은 온실 약초꽃을 보며 아버지의 타버린 어둠을 재건해 놓은 것 같은 감격이 밀려들었다.
“작은누나, 보기 좋지?”
“그래, 승천아, 대단하다. 정말 멋지고 좋아”
“길거리에서 들에서 산에서 쓸모없는 풀이 하우스에서 물과 영양분을 먹고 빛을 받고 가꾸어지면, 유용한 약초가 되어, 자기 쓸모를 찾아가는 것 같아.”
“나도 예전에 그런 생각했었는데... 엄마는 뽑아 버려도 금세 올라오는 집 마당 잡초가 징그럽다고 했었는데, 아버지는 그런 잡초도 세상에 쓸모가 있다고 했거든. 아버지 일 돕는 것도 좋았지만, 그런 잡초 풀을 내 손으로 잘 만들어서 상품이 되는 것이 뿌듯했거든.”
“스토리 식물가 누나가 우리 농장 이야기 블로그에 좀 실어줘.”
“물론이지. 승천아 내 동생이지만,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나는 승천이와 꽃밭을 거닐었고, 승천이는 아버지와 나눈 마지막 대화를 들려주었다.
“산골 집 마당에 흐트러진 붉은 꽃이 양귀비인지 몰랐지. 막내 누나가 꽃이 예쁘다고, 사진 찍어 달래서 찍는데, 아버지가 겉은 예뻐 보여도 흉한 꽃이라고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더라고. 그때는 어려서 별생각이 없었지. 그날 밤에 막내 누나는 잠들었는데, 내가 잠이 안 와서 마당 평상에 누워서 밤하늘 별을 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나왔어.”
“아버지 재미있는 이야기 많이 알고 있지? 나도 어릴 때 산골 집에 가서 밤에 잠 안 온다고 하면, 아버지가 옛날이야기 많이 들려줬었는데...”
“대구 어른 이야기를 해 주시더라고. 왜 아버지가 그 어른 이야기를 그렇게 했는지 그때는 생각 못 했는데, 내가 업둥이라는 거 알게 되고, 내가 크면서 문득문득 아버지 그 말이 나를 붙들고 일으켜 세우고 있음을 알겠더라고.”
대구 어른은 참 어진 분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대구 어른 모습을 통해 아버지도 아버지가 되면 대구 어른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오갈 때 없는 할머니와 아버지에게 방을 내주고, 뭐든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월북자 명단에 올라 있어, 대구 어른 댁에서 나와서 지낼 때도 양식을 지원하고, 아버지 학비까지 보내주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해 줬는데?”
“사람은 어떻게 태어났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살아 가느냐가 중요하고, 어떤 환경에서 살아왔느냐 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라고 하셨어.”
아버지는 당신의 마지막을 예감하셨던 것은 아닐까? 승천이에게 꼭 해야 할 말을 하고 가신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가 우리에게 아버지 소망이 타버린 어두운 땅과 빚만 남기고 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승천이가 일구어 놓은 꽃밭을 보면서 아버지가 우리에게 남기고 싶었던 유산은, 잡초 같은 우리가 각자의 쓸모를 알아 잘 가꾸어 유용한 약초 같은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내적 자본을 유산으로 남기고 가신 것은 아닐까? 생각되었다.
나는 승천이에게 내가 본 승천이 부모님 마지막 모습을 말해 주었다. 승천이는 그날 밤이 없었다면, 오늘 자기가 있었겠냐며? 오히려 내가 담고 있던 죄책감을 퍼내서 꽃밭에 던지며 말했다.
“작은누나, 약초꽃은 치유의 만병통치약이야.”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