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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 Dec 29. 2023

마흔둘,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

헤어질 용기

     

J가 독일로 떠났다.

 어느 볕 좋은 가을날, J를 만나러 가는 길에 노르웨이의 시인 울라브 하우게의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를 함께 챙겼다. 시인의 다정한 메시지를 나누며 서로를 격려하고 싶었다. 서촌의 카페테라스에 앉아 따뜻한 라테를 마시며 시인의 <길>을 그녀에게 낭독해 주었다.


     길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스스로 걸어야 한다

     모르는 곳으로

     먼 길이다


     길은 그런 것

     오직 스스로

     걸어야 한다 길은

     돌아올 수 없다


     어떤 길을 걸었는지

     남기지 마라

     지나간 처음의 길은 바람이 지우리

     <길/울라브 하우게>                                                                  

                                                                  

 가만히 듣고 있던 J는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고, 이제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 얘기를 들은 지 한 달이 조금 지나 그녀는 정말로 독일로 떠났다.  


  올봄, J와 나는 우리 둘만의 북클럽을 꾸렸고, 아이를 키우고 가정을 꾸리며 자신의 삶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여러 여성들의 이야기를 함께 읽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나눴다. 여름이 되었을 때, J는 조만간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했다. 그러곤 몇 달 만에 독일로 떠난 것이다. 상상도 못 했던 전개였다. 책을 나누며 영혼의 교류를 해 온 그녀와 앞으로 꽤 오랫동안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차가운 바람이 더해져 더욱 쓸쓸해졌다. 아이는요? 남편은 뭐라고 하나요? 부모님은 허락하셨나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은요? 그리고...... 우리 북클럽은요...... 머릿속에 수많은 질문이 떠오르며 멍해졌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축하를 건넸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은 분명 축하할 일이니까!


 결혼, 출산 그리고 육아와 같은 지난한 과정을 거쳐 온 여성이라면, 마음 깊은 곳에 혼자 그려보곤 하는 멋진 시나리오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역시 그렇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그 울림은 점점 더 진해지 가끔씩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며 새로운 곳에서의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하지만 내면의 소리가 아무리 세져도 그것을 직면할 만큼 용감하진 못해서 다시 마음속 서랍에 넣어둘 뿐이다.


 J는 마음의 울림을 감지하고 그것을 세상 밖으로 꺼내 주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잘 알기에 그녀의 결정을 열렬히 응원했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헤어지지 못해 방치해 두었던 자신을 돌보며 그녀가 원하는 삶을 찾으리라. 새로운 환경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불균형 속에서 그녀만의 균형을 찾아 가리라.


지나간 처음의 길은 바람이 지우리.

 함께 고민하던 J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떠나자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급해진 마음 위로 불안함이 번져갔다. 수개월 전에 브런치스토리로부터 심사 합격 축하 메일을 받았지만 한참을 쓰지 못한 채 망설이고 던 나였다. 읽고 쓰는 삶을 살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글쓰기 초보의 글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두려웠다. 시작도 해보기 전에 두려움에 압도된 나는 나보다 먼저 쓰는 삶을 시작한 여러 작가들의 책을 읽으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특히 은유 작가의 <쓰기의 말들>에 오래 머물렀는데 그중에서도 "'문학은 용기다'라는 명제를 처음 봤을 때 곧장 와닿지 않았다. (중략) 어쩌면 용기란 몰락할 수 있는 용기다. 어설픈 첫 줄을 쓰는 용기, 자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용기, 진실을 직면하는 용기, 남에게 보여 주는 용기,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용기, 다시 시작하는 용기……. 도돌이표처럼 용기 구간을 왕복하는 일이 글쓰기 같다. 오죽하면 이성복 시인이 말했을까. "글쓰기는 오만한 우리를 전복시키는 거예요."" (p.77)를  읽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 안전해 '보이던' 익숙함과 헤어져 볼 용기를 챙겼다. 나의 글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해 고민하기보다 나의 주제를 찾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쓰기의 말들 / 은유>


 2024년이 되기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 신년에는 '지나간 처음의 길은 바람이 지우리'라던 시인 울라브 하우게의 단호한 듯 다정한 목소리에 기대어 나아가보려고 한다. 나의 비루한 시절은 바람이 다 지울 테니 걱정 말고 계속 쓰기의 힘을 믿어보고 싶다. '우리는 위대함을 달성하는 일에 온전히 관심을 꺼야만 위대해질 수 있다'는 토머스 머튼의 지혜를 빌려 오랫동안 웅크려 있던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용기 있는 한 해가 되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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