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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석 Jul 26. 2024

<대한민국 정통사관 列傳> 중화학공업의 아버지!

강철시대, 김재관박사

뮌헨대학 기계공학 전공, 철강금속학 박사. 64년 12월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에게 ‘한국의 철강공업 육성방안’을 전달하고, 70년 ‘중공업발전의 기반’보고서를 정부에 제출(KIST 초대 연구부장)하였으며, 일본과의 협상과정에서 강한 견제를 극복하고 ‘첨단고로 일관제철소’건설을 관철! 75년 <한국표준연구소>설립을 주도하여 헌법 제127조 제2항, “국가는 국가표준제도를 확립한다”는 ‘국가표준제도’를 헌법에 명문화하였다. 측정기구를 한번이라도 만져본 사람들은 정밀산업에 국가표준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것이다.


 ‘절망한 박태준은 귀국길의 하와이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바로 대일 청구권 중에 농수산용도로 남았있던 1억달러 를 전용하자는 것이었다

문제는 일본이 자신들의 산업경쟁력을 위협할 수 있는 한국의 제철사업에 과연 협조할 것인가 였는데, 이런 난제를 해결하기에 박태준은 청소년기를 일본에서 보내 일본어에 능통했고 일본문화를 잘알고 있어서 최적의 인물이었다.


 박태준을 만난 일본 정재계의 거물들은 조국근대화에 대한 박태준의 애국심과 중후하고 빼어난 인품에 매료되어 어려운 문제들을 앞장서서 해결해 주었다. 양명학의 대가이며 정재계 거물이었던 야스오카 마사아쓰, 일본철강연맹의 이나야마 회장 등이 그들이다.

마지막 고비로 통산상 오히라 마사요시를 면담한 박태준은 한국의 경제상황으로는 농업자립화가 우선이 되어야한다면서 반대의 입장을 밝히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다가, 세번째 만남에서 급하게 일본 정부간행물보관소를 뒤진 정보를 쏟아냈다.

'덕분에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청일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영국으로부터 군함을 차관으로 도입해왔습니다. 제철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은 청일전쟁을 통해 제철소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명치 30년에 7만톤짜리 야하타제철소를 세웠습니다. 그 뒤에 러일전쟁을 준비하는 일본에게 제철소의 필요성은 다시 절실해졌고, 제철소 건설을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은 단순히 산업적 목적의식에서만 제철소를 세웠던 것이 아니라, 안보적 차원을 더 깊이 고려했습니다. 그때 제철소 건설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일본의 1인당 GNP는 오늘의 화페가치로 100달러 미만이었고, 한국의 현재 1인당 GNP는 200달러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대응을 궁색하게하는 역사적 사실과 북한의 안보위협까지 거론하자, 오히라의 작은 눈이 세번의 만남에서 드디어 실눈을 들어냈고 제철건설자금의 숨통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일본제철협상단과의 협상에서는 서독의 최신 기술을 견학한 김재관박사의 활약이 눈부셨다. 한국을 견제하기위해 그들은 세탁기, 밥솥 등을 만드는 소규모 공장을 제안했으나, 김재관은 제선, 압연, 제강을 연속주조하는 지상 100미터에 이르는 고로방식의 최첨 단 일관제철소를 강력하게 주장했고, 결국 선박, 자동차생산이 가능한 후판과 강판을 만들 수 있는 포항종합제철의 건설을 완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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