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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니 May 25. 2020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의 이야기.

읽고 보고 쓰기 #2.  2020 제11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우리는 더 많은 소설을 읽으며 더 많은 타인이 되어야 한다.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세상은 무수히 많은 주인공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

- <이것이 나의 다정입니다>, 하현


한창 한국소설에 재미를 붙여 읽기 시작할 즈음 나는 이런 이유에서 소설을 읽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마도 눈 앞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에 더 집중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 삶과 겹쳐지는, 나도 몰랐던 내 경험과 생각을 깨닫고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들에 손이 가기 시작했다.


그런 이유로 매년 발표되는 문학동네 젊은 작가상을 읽는다. 고전 소설과 거장들의 이야기도 좋지만 아직은 멀리 흘러가버리지 않은 지금의 이야기를 읽고 싶어서.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우리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싶어서.






<음복>, 강화길 - '네가 나를 이해해줘야지. 네가 아니면 누가 나를 이해해줘.'


이 소설은 남편 '정우'의 집으로 제사를 지내러 간 '세나'가 그의 가족을 바라보며 서술하는 형식의 글이다.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할머니와 그 옆을 지키지만 이 집의 '악역'인 고모, 시부모와 남편, 그리고 등장하지는 않지만 이야기의 핵심인 '정우'의 사촌 '정원'까지. 조금씩 뒤틀린 이 가족의 관계를 보며 '세나'는 묘하게 겹쳐지는 자신의 가족을 떠올린다.


바로 네 고모가 이 집의 악역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는 신경 긁는 소리를 하는 데 아주 뛰어나다....  네 부모님이 고모의 그런 성질머리를 내버려 둔 건 할머니 때문이었다. 함께 사는 건 아들이었지만, 할머니가 의지하는 사람은 딸이었기 때문이다. 하소연하고, 짜증을 내고, 온갖 말을 다 쏟아내는 그런 사람. 그녀의 모든 걸 이해하는 사람.
만일 네가 알게 된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이렇게 말하려나. 그래, 고모가 아니면 누가 할머니를 이해하겠어. 고모가 할머니를 이해해줘야지. 그런데 말이야.  

-33p


그래. 내 엄마가 우리 집의 악역이었다. 그래서 나는 외사촌들에게 대답했던 것이다. 너희들과 가지 않겠다고. 엄마를 슬프게 한 다른 식구들과 어울리지 않겠다고. 나는 엄마 편이니까. 우리 엄마한테는 나밖에 없으니까. 나만은 엄마를 절대 미워하면 안 된다고.

 -33-34p


"야, 너 정원이 재수시키지 마라. 주제를 알아야지. 지가 무슨 약대를 간다고."
... 그가 참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할머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들은 말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심하게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바로 그 순간에야, 나는 알아차렸다. 너, 아무것도 몰랐구나.

 -36-37p


그 핵심에 끝내 아무것도 모르는 무해한 남편이 있다. 그의 무지할 수 있는 권력이야말로 제사상 가운데 이물스럽게 놓인 토마토 고기찜처럼 가부장제의 핵심이었음이 드러날 때 전율이 찾아온다. 남성들은 폭력을 행사하거나 권위적이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집안의 온갖 비밀과 불안한 기류 앞에서 단 한 번도 자신을 기소해 본 적 없는 게으른 나르시시즘으로 인해 악이 된다.
 
- 344p, 심사평 中


'내 엄마가 우리 집의 악역'이었기 때문에 정우의 고모를 이해하는 입장이 될 수 있는 세나는 결국에는 할머니의 입을 통해 내뱉어진 진실을 바라보는 정우의 표정을 보고 또 다른 진실을 깨닫는다. 이 집의 진정한 (숨겨진) 악역은 고모가 아니라 '집안의 온갖 비밀과 불안한 기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무지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정우였다는 사실 말이다.


한쪽으로 치우친 채 견고하게 이어져온 가부장제라는 구조 아래에서 '악역'으로 비치는 인물을 과연 단면적으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 악역인 고모에게 당하는 위치에 놓여 있지만 반대로 우리 집의 악역인 엄마를 이해하는,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세나'. '엄마가 나를 이해해줘야지, 엄마가 아니면 누가 나를 이해해줘'라고 말하며 반대 방향으로의 이해를 바라게 된 그녀는 자신과는 반대로 드라마 속의 딸 (아마도 미래에 태어날 자신의 딸)이 아무것도 모르기를 바란다.


정우의 얼굴에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 드러났을 때 서늘함과 동시에 전율을 느꼈다면 한 번쯤은 스스로가 '무지의 권력'을 가지지 못했음을 인지 해 본 사람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이해해야 하는 입장에서 이해를 시키는 입장으로 이어져오는 이해의 굴레 안에서 한 번쯤은, 혹은 지금도 또다시 누군가를 이해하고 있을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가 아닐까.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어쩌면 그때의 나는 막연하게나마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던 것 같다. 나와 닮은 누군가가 등불을 들고 내 앞에서 걸어주고 , 내가 발 디딜 곳이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 그런 빛을 좇고 싶었는지 모른다.

- 86p


나는 나의 행복만큼 내 친구들의 행복을 원한다. 우리가 계속 밝은 곳으로 가려는 마음을 버리지 않을 수 있기를, 자신을 내팽개치지 않기를 바란다. 내 입에는 자꾸 '우리'라는 말이 맴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치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

- 89p, 작가노트  中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사회적인 혼란과 희생, 그 시대 안에서의 글쓰기를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겹쳐진 경험들을 나누며 '그녀'에 대한 동경심을 가졌던 '나'가 10년 후, 이제는 '그녀'의 입장이 되어 과거를 돌아본다.


여러 가지 사회적인 메세지가 담겨 있는 소설이지만 내가 포스트 잍을 붙인 곳은 위의 문장이었다. 같은 글이라도 읽는 사람에 따라 줍는 문장이 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한번 더 느낀다. 그러면서도 반성한다. 꿈틀거리는 변화들 앞에서 누군가를 따라가고만 싶어 하는 것은 아닌지.


'어떤 빛이 지금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빛이 남긴 잔영까지 거짓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 소설의 제목 역시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일 것이다. 희미한 빛 혹은 이미 사라져 버린 빛의 잔영이라고 해도 큰 빛의 실마리가 되어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연수>, 장류진



... 엄마의 인생에서 가장 기쁜 순간이 차례로 갱신되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겨우 이런 일이, 결국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끝에서 결정되어버리는 일이, 일생의 가장 기쁜 순간씩이나 되는 그런 삶은 결코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 280p


"잘하고 있어. 잘하고 있어."

-286p


운전이 유일한 약점인 '주연'은 맘 카페의 추천 글을 보고 운전 연수를 받는다. 강사는 중년 여성으로 운전을 가르치는 중에는 정신이 없으니까, 라는 이유로 툭하면 반말을 하고 주연의 결혼과 육아 계획을 마음대로 세우는 등 무례한 말을 서슴지 않는다.


'주연'은 강사의 행동에 간혹 불쾌함을 느끼고 그녀에게 엄마의 삶을 투영하며 '그런 삶은 결코 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다짐을 되새기지만 그녀의 도움으로 결코 해내지 못할 것 같았던 운전을 하게 된다. 삶과 운전을 동일선상에 놓았을 때 결국 그런 것 아닐까. 때로는 따분하게, 답답하게 느껴지는 누군가가 결국에는 내게 필요한 목소리가 되어주는 것.  


우리는 간혹 내 시간을 먼저 지나간 누군가를 바라보며 '저렇게 되지는 말아야지'라는 다짐을 하곤 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시간을 거쳐간 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그 도움의 목소리를 받아들이고 고마움을 표현할 때, 그렇게 함께 할 때 분명 나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은 나아질 것이다.






이번 작품집에 담긴 소설 중 특히 와 닿았던 위의 세 소설은 앞으로도 이 작가들의 작품에는 고민하지 않고 손을 뻗어도 된다는 확신을 주었다.


하나둘씩 넓어져가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주 느리지만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우리의 삶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나와 우리를 고민하고 더 나아감을 기대해보는 즐거움을 계속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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