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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수 Dec 03. 2023

비가 억수로 오는 날, 우산 하나

내가 느낀 감정은 내 것이 아니었다_27

 


 동생과 나는 초등학교 때, 정확히 말하면 국민학교 때 피아노 학원을 같이 다닌 적이 있었다. 우리 집에는 피아노가 없어서 그저 피아노 학원에서 연습을 하는 것이 연습량의 전부였다. 어느 날 나는 동생이 나보다 진도가 빨리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이미 나보다 앞서가는 동생의 진도를 나는 다시 추월할 수가 없었다. 나와 동생 모두 피아노 학원을 결석한 적이 없고 특정한 페이지를 잘 연주하면 월반의 개념처럼 진도를 건너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학원에서 연습하는 일정한 시간을 채워야만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방식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나,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피아노 학원에는 나 말고도 자매 지간 혹은 형제 지간이 같이 다니는 케이스가 더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들의 경우에도 동생의 진도가 더 앞서 나갔다. 나는 선생님께 왜 나의 진도가 동생보다 늦냐고 묻고 싶었지만 선생님의 솔직하고 냉정한 대답이 돌아올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속으로 부글대면서 아무것도 따져 묻지 못했다.  



'분명 저 선생님은 어릴 적 언니한테 온갖 것을 물려받고 차별받은 경험이 있을 거야. 그래서 그때의 서러움을 이렇게라도 풀고 있는 거겠지.' 선생님이 첫째인지 둘째인지 언니가 있는지 오빠가 있는지는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나름의 분석으로 선생님을 이해하기로 했다. 



 문제는 자신의 진도가 언니보다 빠르다는 것을 동생이 아느냐였다. 기고만장한 그 아이가 그 사실을 안다면 안 그래도 만만한 언니를 얼마나 더 하찮게 볼 것인가. 눈앞이 아찔했다. 결국 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어느 날, 동생과 나는 피아노 학원을 가려고 준비 중이었다. 엄마는 가게에 나가시고 집에 남은 우산은 하나뿐이었다. 기회가 온 것이다. 나는 재빨리 우산을 집어 들고 동생 몰래 대문을 나섰다. 대문 소리가 삐걱하고 나는 순간,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우산 같이 써!" 어느 때고 언니라는 호칭은 생략되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까딱하고 말했다. "일루 와!" "비 오잖아!" "싫음 말든가!" 나는 뒤돌아서 한걸음을 떼었다. "우산 가지고 와!" 온 동네에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산 쓰고 싶음 빨리 뛰어. 학원 늦잖아!" "우산 가지고 와! 나 비 한 방울도 안 맞을 거야아아아!" 산성비라는 단어도 없을 때였는데 비를 맞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양 동생은 현관 앞에 발을 딱 붙이고 서서 악을 써댔다. 눈에는 살기마저 가득해서 나는 우산을 든 채 이대로 피아노 학원으로 달려야 하나 아니면 되돌아가야 하나 망설였다. 다행히 그때까지는 내가 동생보다 키가 0.8cm 정도는 컷을 때여서 한번 붙어볼 만할 때였다.  



 나는 입으로는 학원에 늦겠다고 말하면서 몸은 현관 쪽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학원 가기 싫으면 거기 계속 있던가."나는 거의 이긴 것 같은 느낌으로 비아냥댔다. "우산 가지고 와아아아아!!!!! 나 비 절대 안 맞을 거야!!!!!!!!! 한 방울도 안 맞을 거야!!!!!!" 나는 조금만 더 서두를 걸 후회를 하면서 학원 쪽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기다려! 거기 서! 기다리라고!!!!!" 동생의 악다구니는 극에 달해서 온 동네가 떠나갈 듯했다.






 나는 업무 사이트를 열어 형제 지간의 진도를 확인했다. 형은 학습을 성실하게 하는 아이라서 동생보다 진도를 훨씬 앞서 나가고 있었다. 반면 형의 화상 수업 기록에는 같은 내용을 반복하여 수업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이전 선생님도 학부모의 요구를 받아들여 동생과 수업 진도를 맞추려고 꽤나 노력을 한 듯 보였다. 엄마의 입김으로, 선생님의 협조로 인해 형보다 학습량이 적은 동생은 별 노력 없이도 자연스레 형의 수업 진도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온라인 학습과 화상 수업의 특성상 동생을 따돌릴 방법이 전혀 없는 큰 아이를 떠올리며 나는 괜히 짠한 느낌이 들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질 때 우산이 달랑 하나만 있다면 그놈의 진도를 어떻게 해볼 텐데. 이래서 아날로그가 때로는 좋다는 것을 실감한다. 



 '어머니. 작은 아이한테도 바르게 가르치셔야죠. 열심히 한 만큼 수업 진도가 나가는 것이고 형을 따라잡고 싶으면 열심히 하면 된다고요. 그런 식으로 가르치면 작은 아이가 큰아이를 맘먹는다니까요.' 물론 상상 속에서만 열을 올렸다. 





 

 "쟤는 샘이 많아서 지수 옷 사주면 똑같이 사줘야 한다니까. 어차피 키도 더 커서 물려받고 말고 할 것도 없어." 엄마는 항상 동생이 샘이 많다는 이유로 내 옷을 사면서 자연스럽게 같은 옷을 한 벌 더 집어 들었다. 얼핏 보면 쌍둥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닮은 그 아이와 나는 진짜 쌍둥이처럼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던 적이 많았다. 나는 그게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두 살 터울이나 나는 동생과 동급으로 취급받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키마저 어느새 추월당한 나는 그 아이와 자연스레 동급이 되어 버리고 까딱하면 동생의 옷을 물려 입어야 하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했다. 옷걸이에 똑같은 옷이 나란히 걸려있었다. 그 애가 나보다 덩치가 커져버린 것이 저 같은 옷 두 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되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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