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느낀 감정은 내 것이 아니었다_26
'집에서 일하니까 이렇게 편하네'하는 마인드를 가지고 일을 시작했지만 겉모습만은 과하게 편해서는 안되었다. 내 몸에 걸친 것들은 편하다를 넘어서서 질펀한 차림이었다. 나는 방금 전까지 저녁 식사를 미리 준비하면서 기름이 튀고 국물 냄새가 밴 검정 티셔츠를 그대로 입은 채 컴퓨터 앞에 앉았다. 양반다리를 한 허벅지는 파자마가 감싸고 있었다. 뽀샵처리가 잘되는 고급 사양의 웹캠이었지만 맨 얼굴을 화장한 것처럼 변장하는 기능까지는 없어서 화장은 대충 했다. 일을 시작하고 금세 날이 더워졌다.
"유 디드 어 그레잇 잡! 굳 바아아이~"
취미 생활 중 하나였던 영어 공부에 탄력을 주기 위해 시작한 필리핀 화상 영어의 강사는 에너지가 넘쳤다. 화면 밖으로 에너지를 쏘는 빔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느낌이 좋았다. 그녀에게서 전달받은 에너지를 나는 아이들에게 다시 전송했다. 굿바이! 를 외치며 팔을 치켜들어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수업을 마치던 필리핀 강사를 떠올리며 나도 팔을 치켜들어 흔들며 외쳤다. 굿바이! 민소매 티셔츠 밖으로 우뚝 솟은 듯한 우람하고 탄력잃은 팔뚝의 출렁임은 가히 공격적으로 보였다. 그것을 보고 나는 더 크게 웃었다. 동료 교사들도 민소매를 즐겨 입었다. 한 달에 한번 있는 오프라인 교육에서 항상 튀는 차림으로 주목을 받던 어느 교사는 끈나시 차림으로 수업을 진행했다는 이유로 몇차례 주의를 받았다고 했다. 얼마 뒤 업무 규칙에 수업 중 지켜야 할 사항이 더 추가되었다. '민소매 차림 금지, 카라가 있는 셔츠 입기'
내 눈동자는 아이의 얼굴과 1초2초 올라가는 타이머를 번갈아 보느라 바빠진다. 일이 익숙해지기 전에는 종료 시간을 오버해서 마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떤 선생님은 시간을 여유 있게 더 봐주기도 하는데 우리 선생님은 왜 안 그러는 건가요? 이런 컴플레인을 미리 예측한 회사는 최소 진행 시간뿐 아니라 맥시멈 몇 분이라는 구체적인 내용을 업무 규칙에 추가했다.
"선생님 나 어쩌면 좋아요? 학부모한테 메시지를 보내는데 '습니다'를 '읍니다'로 썼지 뭐예요? 아, 창피해 죽겠어요. 맞춤법 틀렸다고 흉보면 어떡해요. 아 미치겠네!"
50세가 넘은 나이에 소개 추천으로 입사를 한 선생님이 울상을 지었다. '읍니다' 맞춤법으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녀와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실수였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오히려 어릴 적에 외국에 살았던 걸로 여길 수도 있어요. 그러면 한글 맞춤법 바뀐 거 잘 모를 수도 있잖아요? 아마 엄마들이 더 좋아할 걸요!"
우리는 까르르 웃었다. 물론 그 선생님은 성인이 된 후에 미국에서 생활을 했지만 어릴 적에는 우리나라 경기도에서 거주한 토종이었다. 상대가 안심할 만한 그럴듯한 조언을 하면서도 나는 나도 모르게 조금 위축이 된 기분으로 생각했다. '이 분은 한글보다 영어 문장을 더 많이 써본 사람인가?'
강성 고객은 어딜 가나 더 후한 대접을 받는다. 강성 고객을 가장한 한 엄마는 나의 잠재된 스트레스를 조금 자극하고 나섰다.
[큰애가 OO이고요, 작은애가 OO이에요. 우리 작은 아이가 얼마나 샘이 많은가 몰라요. 학습은 물론 큰애가 부지런히 더 많이 하고 있어요. 근데 작은애가 지 형이 진도가 더 빠른걸 못마땅해한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작은애 진도에 맞춰서 진행해 주세요. 큰애가 학습을 더 많이 해도 그냥 작은애 학습진도에 맞춰서 수업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나는 소리 나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전화가 끊어진 것을 확인한 후 나는 중얼거렸다.
'이래서 내가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을 제일 싫어한다니까' 그러면서 픽하고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