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입을 쩍 벌리고 마치 재난영화의 한 장면 같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걔네 집 근처에 바다가 있다고 했었나?' 그녀와 나누었던 편지의 내용들을 떠올리려 눈을 가늘게 뜨고생각에 잠겼다. '이런 어리석은!' 나는 순식간에 요술봉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을 차리고 방바닥에 드러누워 웃음을 터뜨렸다. 내 편지의 행방이 확실히 묘연했다. 진작에 쓰레기통으로 직행을 했을지도 모르는 그 편지가 그 어느 때보다도 걱정이 되었다. 메구미를 찾으려고, 사람을 찾으려고 편지를 보낸 것인데 사람 걱정은 둘째이고 그 사람을 찾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돼버린 편지의 안위가 내심 궁금했던 것이다. 편지가 있어야 메구미도 찾지?라는 식의 마인드는 저 검은 물결 속에서 휩쓸려 떠내려가는 귀한 생명들을 뒷전으로 내몰았다.
'우리 일본어로 편지 교환을 할 수 있을까?'라는 메구미의 문장이 떠올랐다. 16년 만에 그곳에 도착한 (아니 도착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편지에는 온통 알파벳이었다. 왜 하필 또 영어였을까? 곤니찌와는 썼나?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겉봉투에 누구든 보아도 된다는 친절한 문구가 있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그럴 것이 뻔했다. 운이 좋게 영어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 그 편지를 발견한다면 모를까 십중팔구 분명히 그 편지는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다음과 같은 편지로 둔갑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일 년에 한 바퀴 돌면서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주었고 지금은 당신에게도 옮겨진 이 편지는 4일 안에 당신 곁을 떠나야 합니다. 이 편지를 포함하여 7통을 행운이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주셔야......]
결국 그것이 영어인지 일본어인지가 전혀 중요치 않은 일이 터져버린 것이다. 온 도시를 삼켜버린 거대한 물결은 그녀와 나의 추억까지도 휩쓸어가는 듯했다. 내가 보내준 서태지 테이프, 엄정화 사진, 대전 엑스포에서 산 기념품, 우스꽝스러운 캐릭터 모양을 하고 있는 머그컵. 메구미는 서태지 노래 중에서 '우리들만의 추억'이 제일 좋다고 했다. 그 노래의 뜻과, 알파벳으로 발음을 적은 내 편지도 어딘가에서 떠내려 가는 중이다. 우리들만의 추억이 진짜로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어디쯤인가에서 온갖 잡동사니들과 사람들과 뒤섞여 성난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떠내려 간다. 떠내려가고 있다.
만약에 메구미로부터 답장이 온다 해도 고등학교 때처럼 정성을 들여 편지를 쓸 것이라고 장담을 하는 것은 거의 거짓말에 가까웠다. 이제 나는 주부가 되었고 온갖 잡다한 집안일에 아이를 돌보는 일과에 파묻혀 나를 위한 시간을 내기란 힘든 일이 되었다. 또다시 일방적으로 편지가 끊기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우려는 다분했다. 차라리 답장이 오지 않는 것도 뱃속이 편하겠다며 마침내 달관의 경지에 이른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외쳤다. 어쨌든 난 답장한 거다!
이 끔찍한 일로 인해 16년 전 끊겼던 연락은 그때 끊긴 것이 아니라 비로소 이제야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는 알량한 합리화가 가슴 한쪽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슬픈 결말이 되려면 메구미는 16년 전 자기가 살았다는, 집 앞에는 논이 있는 그곳에서 여전히 살고 있어야 했다. 나도 이미 16년 전 살던 곳에서는 살지 않는다. 상대방도 결혼을 하던지 독립을 하던지 그곳에서는 떠났을 수도 있는데 억지로 그녀를 그곳에 앉혀놓고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나는 그저 요즘말로 몇 차례 읽씹이 진행되는 상황에서도 편지를 지속적으로 보내려고 애썼던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를 진심으로 하고 싶었다. 편지의 전체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I'm sorry는 확실히 있었다.
[너는 이미 예전에 이 재해와는 상관이 없는 곳으로 이사를 했을 거야. 나는 그렇게 믿어. 그래서 무소식인 거야. 내 말이 맞지?]
나는 16년이 지나도록 사과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녀가 생뚱맞게 뒤늦은 편지를 보낸 사실을 영영 몰랐으면 좋겠다. 계속 무소식이었으면 좋겠다. 이미 내가 편지를 보낸 사실조차도 모를 그런 장소에 있었으면 좋겠다. 내 편지는 헛짓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 검은 물결이 치기 시작하기 전. 엉뚱한 사람에게 전달된 내 편지는 '행운의 편지'로 둔갑하여 기분 좋게 쓰레기통 속으로 처박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