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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수 Oct 22. 2023

이 편지는 누구든 보아도 됩니다.

내가 느낀 감정은 내 것이 아니었다_24


 안녕하세요. 저는 예전에 이 주소에 살았던 메구미라는 여학생과 펜팔을 했던 한국인 이ㅇㅇ입니다. 거의 16 년 만에 쓰는 편지라 이 주소에 집이 그대로 남아 있는지 변했는지 모릅니다. 그 소녀의 가족이 이 집에 계속 살고 있는지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혹시 지금 편지를 보신 분이 메구미의 가족을 아신다면 이 편지를 전해 주시겠어요? 그렇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2010년 3월 10일 한국에서 




 문방구에서 예쁜 편지지를 고르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20대 시절 교회 전도사님처럼 보이는 남자분이 볼펜을 고르고 있던 나에게 여학생이 좋아할 만한 크리스마스 카드 좀 골라 달라고 부탁을 한 이후 처음이었다. 메구미는 항상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편지지에 편지를 썼었다. 편지지 세트를 고르면서 그 아이가 오래전 문방구에서, 편지지 코너 앞에 서서 아기자기한 편지지를 고르는 모습이 떠올려진다. 알파벳을 또박또박 예쁘게 쓴 편지지마다 꼼꼼한 여학생의 성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편지지를 고르면서 편지의 길이가 어떻게  될지 몰라 파스텔 톤의 은은한 색이 도는 편지지와 봉투 세트를 두 개를 샀다. 첫 문장에 무슨 말을 써야 하는지도 고민이 되었다. 메구미 안녕? 잘 지내고 있니? 저를 기억하십니까? 무슨 일을 하고 지내니? 집 앞에는 아직도 논밭이니?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사람에게 건네는 첫마디를 고르기란 갑자기 결정 장애가 생긴 것처럼 참 어려운 일이다. 




 나는 메구미에게 보내는 편지 외에 한 장의 편지를 더 동봉했다. 주소를 쓴 겉 봉투에는 눈에 잘 띄도록 두꺼운 매직으로 한 문구를 적었다. <이 편지는 누구든 뜯어보아도 됩니다.>  혹시 그녀의 가족이 이미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그 집에 다른 사람이 살고 있을 것을 가정했을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편지를 쓰는 내내 무겁고 동시에 설레는 마음을 안고 그저 이 편지가 메구미에게 기적적으로 도착하기를 바랐다. 



 고등학교 때 했던 것처럼 영어로 편지 쓰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가끔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느낀 감정을 끄적거리듯 다이어리에 적어 놓는 습관은 있었지만 편지라는 것은 좀 더 진지한 생각을 요구했다. 그때 메구미에게 더 이상 편지를 쓰지 못한 이유에 대한 변명은 물론이고 변명을 하다 보니 누군가의 탓으로 인해 우리의 순수한 편지 교환이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따위의 이야기는 이제 구차한 것이 돼버렸다. 연습장에 썼다가 죽죽 긋기를 반복했다.  



  

 컴퓨터의 도움을 받긴 해도 어쨌든 내가  한글로 된 편지를 완성해야 영어 편지도 완성이 될 것이었다. 이번에는 내용에 더욱 신중해야 했고 고등학교 때 나누던 연예인 이야기도 포함되지 않았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결혼은 했는지가 신중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은 잡다한 나의 일상 이야기로 편지지가 채워졌다.    




 아날로그 감성은 디지털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실감한 적이 있었다. 영어 공부를 위한 친구를 사귀기 위해 언어 공부 사이트를 돌아다닌 적이 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이전 나는 그곳에서 한국어에 관심이 있는 외국인 친구를 찾아 나섰다. 프로필에는 나의 휴대폰 번호까지 공개하며 '내가 전화를 할 테니 전화 요금은 걱정하지 마세요'라며 상대의 메시지를 기대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특별히 한국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영어 원어민과 친해지기란 내가 전혀 관심도 없는 언어의 원어민이 내게 한국어를 가르쳐 달라며 접근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20대의 미국인 남성과 연결이 되었다. 나는 이메일로 잡다한 이야기를 했고 그는 편지에서 틀린 표현을 수정해 주었다. 그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호감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중에서도 우리나라에서 영어 원어민 강사를 하는 것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이메일에서 말했다. '솔직히 나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어. 친구가 한국에서 영어 강사를 하는데 대우가 아주 좋대. 나도 그곳에 가서 영어 강사를 하려고 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것이 불법이라 할지라도.' illegal이라는 단어를 마지막으로 그는 사라졌다. 



 

 타냐는 자신을 러시아계 미국인이라고 소개했다. 한국 드라마를 나보다도 많이 보고 드라마에서 나온 한국어 표현을 물어봤다. 한국 드라마의 제목을 말해주며 그 드라마를 봤냐고 물어보는데 나는 오히려 제목도 못 들어본 드라마들이었다. 그녀는 식당에서 젓가락질을 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며 한국에서 수입한 음식을 즐겨 먹는다고 했다. 어느 날 타냐는 한국에서 왔다는 어느 하드에 대해 설명을 했다. '팥맛이 나는데 중간중간 붉은 통팥이 들어 있어. 달콤하고 정말 맛있어! 나는 그것을 정말 좋아해!' 나는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나는 그 하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과의 첫 만남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어릴 적 동네에 큰 제지공장이 있었다. 공장 건물의 창문이 주택가 길가로 나있었는데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친구와 걸어가는 나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말소리는 그 창문을 통해 흘러나왔다. 머리에 하얀 모자를 쓴 아주머니는 '얘들아! 저기 슈퍼에 가서 비비빅을 좀 사다 줄래?'라며 창문을 통해 천 원짜리를 던졌다. '비비빅이요?' 나와 친구는 아주머니에게 되물으며 하드의 이름을 기억하려고 했다. 친구와 나는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비비빅이 뭐야. 이름이 너무 웃긴다. 슈퍼에는 진짜 비비빅이라는 하드가 있었다.




  Is it called 'Bibibig'? 타냐에게 물으니 그녀는 맞다고 했다. 내가 어릴 적 비비빅을 처음 알게 된 에피소드는 설명하지 못했다. 디지털로 만난 친구는 아날로그 시절의 기억을 끄집어내 주고 어디론가 또 사라졌다. 





 메구미와 내가 편지를 교환한 기간은 2년이 조금 못되었다. 평소 책도 잘 안 읽는 내가 편지를 쓰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영어가 아닌 한글로 말이다. 종이로 된 편지지에 영역을 한 글자들을 눌러쓰고 크리스마스나 생일이 다가오면 선물을 넣은 소포를 부치기 위해 우체국으로 달려가는 번거로움은 컴퓨터로 톡톡 거리는 간편함 보다도 더 진한 감정을 불러 모았다. 쉽게 쓴 편지는 마치 몸에 안 좋은 인스턴트 간식을 먹고 건강관리를 위해 몇 배 운동을 하여 몸무게를 조절해야 하는 것처럼 (상대에 대해 별로 기대를 하지 않는) 감정을 다스리든지 아니면 나의 일방적인 노력이 요구되었다. 상대가 나를 통해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 절실하지 않은 이상.



  

 편지를 보낸 지 어느새 1년이 흘렀다. 그동안에 나는 편지를 보낸 사실도 잊은 채 일상생활에 묻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TV를 틀 적마다 일본에서 일어난 엄청난 사건이 연일 보도되었다. 뉴스 화면에 흙탕물이 가득했고 집이며 차며 동물들, 심지어 사람들도 개미가 물에 휩쓸려가듯 떠내려갔다.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치바시를 떠올렸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메구미는? 내 편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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