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느낀 감정은 내 것이 아니었다_23
이 얘기를 꺼내자 관심을 갖는 친구들이 몇 명 있었다. 메구미는 4개의 새로운 주소를 보내주었다. 나는 그 주소를 편지 쓰기에 관심을 갖는 친구에게 쿠폰을 뿌리듯 나누어 주었다. 친구들이 편지에서 어떤 얘기를 나누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메구미에게 보낼 선물에 대해서만 신경을 썼다. 내가 무언가를 보내면 그 애는 그에 걸맞은 비슷한 자기 나라의 것을 찾아 내게 보내주었다. 일본에서 온 것임을 단번에 알 수 있는 아기자기한 액세서리나 장식품은 내 책상 한 귀퉁이를 장식했다. 상대는 외국인이고 나는 우리나라를 대변하는 청소년 중 하나가 된 것처럼 편지 한 통마다 정성을 다했다.
존재조차도 모르던 굉장한 사명심을 가진 듯 답장 보내기에 열심이던 나는 몇 년 후 그 일본 소녀를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지워가고 있었다. 고3이 되면서 엄마는 내가 해외 펜팔을 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해하셨고 그것 때문에 별로 돈독하지 않던 나와 엄마의 관계는 더욱 삐걱거리는 단계까지 치닫게 되었다. 아버지가 우려했던 종말이 사태는 조금 수긍이 가는 듯했지만, 공부에 방해가 된다면서 쓸데없는 짓은 그만두라고 야단이던 엄마는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았다.
어차피 공부와는 인연이 먼 나에게 고2나 고3이라는 위치는 전혀 의미가 없었다. 책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 내가 편지 한 줄이라도 적으려면 먼저 한글로 편지를 완성하고 그 편지를 영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사전을 찾아 헤매고 스펠링이 틀린 곳은 없나 몇 시간을 영어 단어와 시름해야 했다. 영어 한 단어라도 눈에 익히는 기회가 된 것은 분명한 일이었지만 엄마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누가 들으면 중간정도 하는 공부를 편지 때문에 더 망친다고 오해하기 딱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편지함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편지 봉투가 작아서 아래쪽으로 쏙 들어가 있나 하며 손을 편지함 깊숙이 집어넣어 휘저어 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엄마는 숨겨 놓았던 편지를 그제야 돌려주며 그만하라고 또 닦달을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엄마에 의해 연락이 끊길 것을 우려한 나는 막냇동생을 구슬리기 시작했다. 편지 오면 숨겼다가 누나한테 줘라. 그러면 그때마다 천 원씩 줄게.
직장을 다니면서 가끔 그 애가 생각이 나곤 했다. 나는 그 애가 보낸 편지를 들춰 보며 빨리 답장을 써야지 속으로 다짐을 했는데 그 다짐이 다짐으로만 몇 년째 이어졌다. 둘 다 고등학생이었을 때는 그저 신분이 학생이었는데 이제는 직장인(그것도 대학을 진학하지 못해 별 다른 선택이 없어 시작하게 된) 신분으로 편지를 써야 하고 그 직장이라는 것이 그 애 입장에서는 듣도 보고 못한 변변치 않은, 월급은 제때 받아 본 적 없이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르는 구멍가게 같은 회사라는 것을 편지에 담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대학은 보기 좋게 진학하지 못했지 뭐야! 학교도 안 가고 집에 하루종일 있을 수는 없잖아! 엄마랑 또 싸울게 뻔한데. 그냥 아무 직장이나 다니고 있어. 근데 회사가 거지 같아서 월급이 만날 밀려. 조만간 문을 닫을 거 같으니까 다른 직장을 슬슬 알아봐야겠어. 딱히 우리 회사만 그런 것은 아닐 거야. 너도 뉴스에서 봤지? 우리나라 IMF잖아! 이렇게 쓸 수는 없었다.
내가 답장을 제대로 보내지 못하고 있던 때 메구미는 2차례동안 내 답장 없이 편지를 보내왔다. 꼭 편지 때문이 아니더라도 엄마와는 사사건건 부딪히는 일이 많아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도 내 얼굴에서는 웃음기는커녕 우울함으로 가득한 머릿속을 부여잡고 답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편지에 대해 미안함이 있다가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음을 합리화시키기 좋았다. 메구미야 사실은 내가 좀 마음이 좀 힘들었거든. 내가 다른 애들보다 사춘기를 늦게 했나 봐.
검은 마법과 쿠페빵을 읽다가 치바라는 글자를 읽었을 때 그리고 그 치바가 내가 알고 있는 그곳이 확실한 지, 오래된 편지 상자를 열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얘는 잘 있나?'였다. 사실 치바라는 지명은 오지도 아니고 큰 도시여서 일본 소설에 간간이 나오는 지명이었다. 나는 메구미가 잘 있나 궁금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안 있어 우리 집은 두 번 이사를 했고 쿠페빵 책을 접했을 때는 나는 결혼하여 또 다른 주소에 살고 있었다. 후에 메구미도 나처럼 오랜만에 기억이 나서 나에게 편지를 보냈다 하더라도 새로 이사 온 거주자가 그것에 대해 신경을 써줄 리가 없었다. 새로운 주소에서 내가 다시 편지를 쓰지 않는 이상 어차피 연락은 끊길 수밖에 없었다.
영어는 자신 없다며 일본어로 편지를 교환하기를 원했던 그 소녀가 영어로 또박또박 예쁘게 쓴 편지를 보며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내 생일에, 맞춰 뭐라고 말했는지 '대사'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거의 못 알아들을, 생일 축하 메시지를 영어로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는 '얘도 어지간히 정성을 쏟았구나'라는 생각을 새삼 들게 했다. 잘 살겠지. 나처럼 결혼해서 아줌마 됐겠지. 그럴까? 살아 있겠지?
당연하다고 여길만한 것을 의심하며 나는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나는 컴퓨터를 켰다. 편지지에 한 글자 한 글자 쓰던 것을 이제는 컴퓨터로 좀 더 빠르게 써 내려갈 수 있고 영어 사전도 컴퓨터에서 금방 찾을 수 있다. 문장이 맞는지 인터넷에 물어보면 답을 해주는 이도 있었다. 그 편지에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문장도 빠뜨리지 않았다. 16년 만의 답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