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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Feb 08. 2024

보통의 특별한 일상

나의 평범한 후쿠오카 이야기

보통의 특별한 일상을 보냈다. 

 친구가 생겼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을 잘 찾지 못해 온 길을 되돌아가던 중, 같은 곳을 가는 E를 우연히 만났다. 함께 동행하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느꼈다. 그가 좋은 사람인 것과 나와 결이 맞는 사람 일 것을. 개인적으로 친분을 이어가고 싶었고, 가끔 발휘되는 적극성을 꺼내 다음을 기약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운명처럼 다가오는 사랑처럼 우정 역시 그렇게 온다는 생각을 해봤다. 어쩌면 매 순간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 몰랐을 뿐, 사실 모든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지는지도 모른다.  

 기약 없는 약속을 않기 위해 노력한 덕분에 E와의 만남은 수일 내로 이루어졌고, 불과 얼마 전 알게 된 사람이라는 어색함 없는 시간을 보냈다. 국적과, 성별, 현재의 여건(해외생활, 육아, 잠시 중단된 사회 경력)에서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통하는 부분이 있었고, 심지어 서로의 나이와 아이의 나이, 아이의 성별까지 같았던 그와 공감대는 많았다. 그래서 좋았지만, 지금 상황(해외생활, 육아, 잠시 중단된 사회 경력, 앞으로의 계획)에 따른 그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알 것 같아 내 마음이 지고 있는 몫까지 얹어진 마음 한구석이 살짝 슬펐다. 그는, 그 마음조차 유쾌함을 살짝 가미해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함께 명란(めんたいこ, 멘타이코) 크림 파스타를 먹고(명란이 유명한 후쿠오카 답게 명란이 듬뿍 들어있다.), 초코 크로와상이 맛있는 카페에 갔다. 오랜만이었다. 한때는 무척 익숙했던 일상의 한 순간을 누리는 일이.

 마음이 맞는 친구와 맛있는 것을 먹고, 차 한잔 하며 익숙한 언어로 일상의 수다를 떠는 일. 무용(無用)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무용하다'는 표현은 쓸쓸하지만) 사실은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그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기뻤고, 마음 한끝이 조금 저렸다. 집으로 돌아온 후 한동안 약간의 먹먹함의 기운이 담긴 마음을 안고 지냈는데, 정확한 포인트는 이것이었다. 

 평범한 일상이라 여겼던 그것을 감각하는 일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래서 좋았지만, 한동안 잊고 지낸 나의 한 부분이 떠올라 그것들로 인해 먹먹했고, 그리웠다. 명료하게 한 단어로 지칭할 수는 없는 그 감정을 얼마간 앓았다.


 나의 후쿠오카의 삶은, 살면서 그동안 몸담았던 어떤 삶과도 닮지 않은 모습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토록 고요하고 잔잔하게 살아본 적이 나는 없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형태의 삶이지만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이곳의 삶을 좋아한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내 안의 새로운 모습들을 만나고, 이곳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배움들을 흡수하며 지내고 있다. 

 그럼에도 다른 삶을 산다고 이전까지의 내가 지워지거나, 이전의 삶을 살던 나의 모습과의 접점(接點)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것을 놓치고 있었다. 여건이 되지 않아 놓칠 수밖에 없었고, 살아가는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되는 행위가 아니라 부재감을 크게 느끼지 못했던 일상의 한 부분의 부재를 불현듯 알아채 슬펐다.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아주 좋아했던 일은, 마음이 맞는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었다. 우정으로만 채움 받을 수 있는 마음의 한 공간을 채우는 일. 메신저나 전화가 아닌, 한 공간에서 함께 감각하며 같은 순간을 공유하는 일. 평범하고 당연해서 몰랐던, 내 삶의 사랑하는 한 부분이 긴 시간 부재하고 있었음을 발견한 뒤 뒤늦은 상실을 앓았다. 

  나는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시기적으로 후쿠오카에 온 시기와 맞물렸을 뿐, 언제까지 같은 모습으로 같은 곳에 머물 수만은 없으므로 언젠가는 겪어야 했던 일이었다. 돌아갈 수 없는 어떤 경계를 분명히 넘어 버렸음을 느꼈던 날. '만남'이 촉매제가 되었을 뿐 그것은 사실 예정된 상실이 아니었을까. 방법은 하나다.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거나. 그 과정에서 부유(浮遊, 행선지를 정하지 아니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님)하는 마음을 잘 끌어안고 나아가는 일. 단계별 과업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부유하는 마음을 잘 끌어안을 수 있는 힘을 가진다면 조금은 삶 속에 머무는 일이 수월하지 않을까. 과거의 나를 끌어안고 살지는 않되, 필요하면 그때의 나와 연결될 수 있는 끈을 놓지 않는다면 조금은 덜 아프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내게 상실감을 알려준 것은, 나를 일으킬 힘도 갖고 있다. 

 그럼에도 친구와 보낸 보통의 특별한 일상은 내게 즐거움을 주었고 긍정적 자극을 주었다. 그러한 긍정적 자극은 분명 일상에 충실할 수 있는 힘을 실어주었다. 언제까지 전 단계의 모습을 그리워할 수만은 없으므로.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일. 가끔 만나서 일상을 나누고 서로를 격려하는 일. 그것이 마침내는 '우정'에 바라고 줄 수 있는 모든 것 아닐까. 

보통의 특별한 일상을 보낸 덕분에, 보통의 특별한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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