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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Feb 23. 2024

소소하고 평온했던 어느 주말

대단한 한방보다는 매일의 삶에 소소한 즐거움이 있기를

공연(公演)에 진심인 나라에 살고 있다.

 주말 간 아이의 '와타이코(わたいこ, 和太鼓, 일본 전통 북)' 공연이 있었다. 유치원에서 지속적으로 배워 온 '타이코(たいこ, 太鼓)'를 유치원 운동회에서도 연주하고, 일본 경찰서 앞에서도 연주하더니, 급기야 지금 사는 시(市)의 큰 홀에서까지 연주하는 기회가 주어져 감사하게도 다방면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번 행사 'どんどこ Kids(돈도코키즈)'는 지금 살고 있는 시(市) '교육위원회' 주관으로 개최되는 행사로, 시(市) 내 어린이들이 주체가 되어 일본북 '와타이코(わたいこ, 和太鼓)'를 기본으로 한 다양한 공연을 선보이고,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는 게스트로 참석해 함께하게 된 공연이었다. (참고로 행사'どんどこ Kids'는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했다. 입장료는 성인기준 500엔)

 출연자 집합시간에 맞춰 일찌감치 아이를 행사장에 데려다주고, 공연시간이 되어 행사장으로 향했다. 

 큰 무대였다. 앞서 진행되는 다른 공연들을 지켜보며, 행사의 게스트지만 우리에게는 '메인'인 아이의 순서를 기다렸다. 몇 차례의 휴식 시간이 지났고, 기다림 끝에 아이가 등장했다. 곧 '타이코' 연주가 시작되었다. 

'북소리' 자체가 가진 힘이었을까, 아니면 '내 아이'가 등장하는 무대였기 때문이었을까. 북소리를 들으며 마음속에서 여러 가지 감정들이 생겨났다 사라졌고, 마음속에서 튀어나오고 싶었을 갖가지 감정들을 허용했더니 역시나 울컥한 감정도 끝내 섞여있었다. 아이에 대한 대견함도 컸다. 이국의 삶에 잘 적응하고, 큰 무대에서 최선을 다해 연주하고 있는 아이가 대견한 한편, 불완전한 나를 보완해주고 있는 환경에 안심도 되었다. 아이는 미숙한 '내가' 키우는 게 아니고, '아이가' 크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나의 영역밖에서 수없이 아이에게 행해졌을 가르침과 보살핌을 실감하며 감사한 시간이었다. 

잘 자라고 있구나.

공연을 마친 뒤, 다가오는 봄이 아름다워 공원에 갔다. 저녁식사를 위해 좋아하는 스시집을 예약해 두고, 함께 공원을 걸었다. 추위가 지난 후 공원을 걷는 것은 모처럼의 일이었고, 함께하는 것으로 충분했던 시간이었다. 

 충만하다 여겨지는 일상을 보내면 생각한다. 내 진짜 저력은 이 일상에서 나오겠구나라고. 나를 충전하는 힘의 원천은 일상이라고. 대단한 한방이 없어도 그 자체로 충분한 시간들. 가끔 나는 비로소 진정한 내가 되어가며, '나'의 삶을 살고 평온하게 그 안에 머물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것은 어쩌면 비주류 이방인인 현재 위치에서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누구나 유. 일. 한. 자신의 삶을 삶이 당연한데, 지금은 그 유일함이 너무 두드러져서, 다시 말해 나와 같은 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없으니 나는 비로소 내가 되어 거기서 오는 평온함을 누리는지도 모른다. 주변에 있는 일본 사람들과 같은 길을 걸을 필요가 없음을 잘 알고 있기에. 당장의 필요를 침범받거나, 그들과 같은 것을 원하지 않는 이상 이곳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일은 좀 더 수월할지도 모르겠다. 설령 같은 것을 원한다 해도, 끝내는 그들과 갈 길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 좀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상황을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다시 한국에 돌아가, 같은 국적을 가진 사람들과 같은 것을 원해야 하는 환경에서 살아간다면 나는 이 평온함을 잃고, 나를 둘러싼 환경에 휘둘리며 주변을 살피고, 크고 작은 일에 안절부절 연연하며 그렇게 살게 될 것일까. 

 설령 그렇게 된다 할지라도, 다가오지 않은 날을 앞서 걱정할 필요는 없으니 지금은 그냥 이 삶을 찬찬히 누리자. 그것이 현재를 사는 가장 현명한 방법일 테니. 이 시간 동안 마음의 힘을 충실히 길러 놓는다면, 훗날 다른 환경에 놓인다 해도 조금은 굳건히 '나'만의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다가오는 봄이 느껴지던 공원은 아름다웠고, 충만한 날이었다. 

 덧. 'どんどこ Kids' 공연 간에 마지막 순서로 출연진들의 합동공연이 있었다. 별생각 없이 공연을 지켜보던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공연 간에 가운데에서 북을 치던 분은 시메코미(しめこみ, 締(め)込み)라는 의상만 입고 있었다. 끈으로만 이루어진 그 옷. 스모 할 때 착용하는 샅바를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축제나 행사등에서 그 의상을 착용한 남자들을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지만(여름 축제 때는 어린 남자아이들도 입고 다닌다.), 한국화(化) 되어 있는 나의 사고는 순간 이 공연은 어린아이들도 참석하는 공연이라는 사실에 의아해했다. 그리고 다시 깨달았다. 이곳은 분명한 일본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나는 끝내 이곳의 이방인일 수밖에 없겠다는 사실을. 

모자이크를 하니 더 이상해 보이는데, 안 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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