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전역, 그리고.

by 수진

7월 31일. 이변 없이 나의 전역일이 왔다. 아직 현실감이 없어서 느낌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밤늦도록 꾸린 짐을 모아두고 부대로 향했다. 오늘의 일정은 심플하다. 사단 신고, 대대 신고. 부서별 인사. 끝. 근처에 근무하는 동기가 일부러 휴가를 내준 덕분에 그 후에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대대에서 함께 전역하는 분들(나 포함 3명)을 만나 사단으로 이동했다. 우리 말고도 오늘 전역하는 분들이 제법 많다. 다들 진로는 정하셨을까. 나는 한동안 좀 멍하게 있을 계획이다. 앞으로의 진로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일단 정신부터 차리고 다음을 계획해야 할 것 같다.

참모장님께 전역 신고를 마치고 덕담을 듣고 차도 마시고, 그간 함께 업무 했던 부서에 찾아가 인사드리고 대대로 돌아왔다. 대대장님 신고를 기다리는데 옆 부서 선배가 오더니 의중을 묻지도 않고 점심 약속을 잡고 사라지신다. 선배는 알까. 어떤 침범은 따뜻하다는 걸.

덤덤했던 마음이 조금씩 이별 모드로 들어간다. 대대장님과 차를 마시는 동안 본청 앞에 간부들이 모였고, 축하해 주는 틈에서 전역 신고를 하고 감사패와 기념 선물도 받았다. 모여있던 간부들과 차례차례 인사를 나누며 마지막 마음은 감사하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짓고, 이제 부대를 떠난다. 의리의 운영과 계원들은 따라 나와 마지막까지 함께해 주고 있다. 모두 잘 지내. 정말 고마웠어. 악수를 끝으로 우리의 만남을 맺는다.

가라앉은 마음으로 선배님과 부서 사람들과 식사를 마치고 이제 우리는 헤어진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언제나 건강하세요. 동료분이 서프라이즈 선물로 가게에 맡겨 둔 케이크를 받아 그곳을 떠나는데 모르는 사이 조금 눈물이 났다. 끝났다. 이제 정말 모든 게 다 끝났다. 마지막까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래도록 잊지 않을게요. 모두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너도 그동안 많이 고생했어. 기다려준 동기와 늦도록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Epilogue. 모든 것에서 놓여났다. 쉼 없이 이어지던 업무와 계급으로 엮인 인간관계, 통제된 생활, 수시로 울리던 전화벨, 불시 호출에 따른 긴장... 모든 것이 떠났다. 군 생활의 어느 순간부터 내게 따라붙었던 무기력과 우울감은 아직 남아있다. 나는 여전히 젊지만 삶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여기는 건지 정말 길을 잃은 지는 모르겠다. 마침내 홀로 삶을 마주하니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삶에 나의 자리부터 만들어야 한다. 내가 없이 흐르는 삶을 관망했을 뿐 깨어있던 날이 드물었다. 삶의 어느 한 부분도 제대로 갖지 못했다. 흘러가는 대로 살며, 되는대로 버티던 시간들. 이제 삶에 나의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가족, 친구, 주변 사람, 내가 지내던 공간... 여전히 그대로이고 그곳에 나의 자리도 있지만 그것들이 길 잃은 삶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진짜 나의 삶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며 나를 위로하고 속이던 시간들. 유예기간은 끝났다.

나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일상' 뿐. 일상을 잡아야 한다. 온전히 깨어서 일상을 맞이하는 것이 얼마 만일까? 배우고 싶던 요가는 시작하지 않았다. 자격증, 대학원, 취미생활... 한 시절 잠시나마 원했던 것에 대한 갈망도 사라졌다. 다시 무언가에 얽매이는 것은 너무도 내키지 않아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다. 그저 의식의 흐름을 타고 일상을 떠도는 일. 그것만을 원했다.

느긋하게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낮잠을 자고, 친구들을 만나고, 커피를 마시고, 여행을 떠나고, 남자 친구를 만나고... (그 친구는 나의 남자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만나고 있으며, 훗날의 일이겠지만 만남의 초반부터 이 친구와 결혼할 것 같은 예감을 받았다.) 느릿느릿 하루를 부유하면 저녁이 왔다. 저녁을 먹으면 집을 나섰다. 한강과 끝자락이 맞닿아 있는 집 근처 둘레길을 강이 보일 때까지 걷다 보면 삶을 견딜만했다. 불행하지 않지만 특별히 행복하지도 않은 시간들. 이렇게 시간을 견디며 삶 속에 나의 자리를 잡고 나를 찾아가는 중이다.

느리게 흐르는 일상의 많은 시간은 여전히 비어있고 나는 공허했다. 군 생활의 공허에는 전역이라는 끝이 있었지만, 전역 후 공허는 끝 모를 아득함이 이어진다. 아득함을 메우기 위해 책을 읽었다. 시간의 흐름을 견디기 위해 무언가 해야 했지만, 그 무엇은 결코 부담되는 어떤 것이어서는 안 되었다. 마음의 공허감을 줄이기 위해, 시간의 흐름을 견디기 위해 책들을 읽어치웠다. 여러 개의 도서관을 오가며 가족들 명의의 대출증까지 활용해 마음이 끌리는 책들을 수없이 읽으며 나는 비어있는 시간을 채우고 마음을 치유해 갔다.

8개월이 흘렀다. 마음의 힘이 자란 것일까. 결코 내 것 같지 않던 삶이 다시 내게 오고 있다. 조금씩 무언가를 원하는 바람이 마음에 깃들고 있다. 한걸음 사회로 들어가고 싶은데, 쉬엄쉬엄 하기에 적당한 일자리가 보인다. 대안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주 1회 중국어를 가르치며, 무역회사의 파트타임 업무를 병행했다. 한 번쯤 대학 전공을 활용하고 싶었고, 회사 생활도 겪어보고 싶던 내게 알맞은 일이었다. 느리다 못해 지루해진 일상과, 줄어들던 통장 잔고도 얼마간 나를 부추기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비로소 한 시절을 마무리 짓고, 새로운 걸음을 뗄 준비가 되었음이 느껴진다. 이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자. 무엇이 나를 기다릴지 모르지만 나는 여전히 젊고, 삶은 계속되기에 용기를 내서 앞으로 나아가자.

그리고 또 하나의 과업. 오래전 그날을 떠올려 본다. 글이 나를 찾아온 날. 그 글을 만나던 순간을 기억한다. 군인이 되기 위해 극한의 훈련을 견디던 시간 강렬하게 나타나 나를 사로잡은 글. 낱낱이 읽지 못했던 숨겨진 글들. 그 글을 만나기 위해 견뎌야 했던 군인의 시간들. 군인의 시간을 마치고 나를 부정했던 많은 날들... 마침내 글이 나를 찾아온 대가를 알았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이제 그 글을 만나러 가자. 기쁨으로.



안녕하세요. 수진 작가입니다. 지면을 통해 이렇게 인사드립니다. 긴 연재의 시간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래전부터 한 번은 쓰고 싶던 글이었습니다. 생각이 채 정리되지 않아 끝까지 연재를 이어갈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지만, 의지가 사라지면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아 시작해 버렸고 끝을 맺게 되어 기쁜 마음이 큽니다. 연재를 이어가며 자주 고비는 찾아왔지만, 휴재라는 형식을 입고 한번 놓으면 다시 잡기 어려울 것 같아 완벽하지 못하더라도 제 나름 끝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동안도 틈틈이 여자 군인 생활에 관한 글을 썼지만 전역에 관한 글은 쓰기 어려웠습니다. 왠지 그 글을 쓰면 그 시절을 맺고 나아가야 할 것 같아서 더 망설였던 것 같아요. 물론 글을 쓰고 난 뒤 달라진 건 없고, 그 시절과 헤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마침내 한 번은 들여다보게 되어 제게도 의미 깊은 일입니다.

무엇보다 함께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보는 이 화면이 단순 비어있는 화면이고, 글을 쓰는 일이 그 화면을 채우는 것이 전부였다면 결코 이 연재를 이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족함에 때로는 화끈거리는 미숙한 글을 읽어주시고, 공감해 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많이 감사했습니다. 말할 수 없이 큰 힘이 되었고, 덕분에 그 시절을 다시 정리하며 몰랐던 것을 발견하며 지난 시간이 더 다듬어질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저의 글이 읽어 주시는 분들께 작은 온기라도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쓰기를 이어가고 싶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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