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을 기다리며
다른 이의 일은 단언할 수 있는데, 나의 일은 결론을 알아도 단언할 수 없다. 지금 구체적인 경우를 꼽자면 '전역'.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모든 군인에게는 전역의 날이 온다는 것을. 그럼에도 나의 전역은 도저히 단언할 수 없다. 때가 되어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좀처럼 그려지지 않는 나의 미래를 억지로 끌어와 본다. 나에게도 전역의 날이 올까. '나'의 전역일이 올까.
날마다 바빴다.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답게 행정업무가 끊이지 않는다. 정해진 업무 외에도 수시로 내려오는 대대장님과 상급 기간의 지시사항을 수행하고 각종 검열에 대비하면 일은 끝나지 않았고, 야근은 거의 매일의 수순이었다. 주말 출근을 할 때도 있었다. 숙소에 가도 기다리는 사람이 있거나, 즐거운 일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늘 부대를 벗어나고 싶었다.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면 잠시라도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몸으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는 채 삶이 흐르고 있다. 전역 전 새로운 부대를 겪어 보고 싶어 부대 이동을 선택했는데 덕분에 전역에 관한 확신은 명확해졌다. 이곳이 첫 부대였다면 아마 이 조직을 더 빨리 떠났을지도 모른다. 재미있으려고 군대에 온 건 아니지만, 재미가 너무 없다. 이제 넓은 세상으로 가고 싶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의 흐름을 견디다 보니 마침내 희미하게 보인다. '나'의 전역일이. 이변이 없다면, 시간이 흐른다면 이제 그날이 올 것이다. 이변은.. 없겠지?
드디어, 많은 날들을 정규 근무시간을 마친 뒤 18:00시 이전에 퇴근하고 있다. 후임자가 뽑혀 옆자리에 앉아있다. 업무 인수인계 외 개인 과업은 하나다.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을 만나는 일.
떠남을 생각하니 눈에 밟히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연락이 이어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드물지만 인연이 이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인연이 이어져도 대부분의 만남은 결국 이곳이 마지막이고, 다시 만난 나는 이 시절 이 마음을 가진 나는 아닐 것이다. 상대 또한 그러할 것이다. 이 시절 나는 이 시절의 사람들과 이제 만남을 맺는다. 이 시간과 이 시절 인연들과의 맺음을 준비해야 한다.
구체적인 몇몇의 얼굴이 떠오른다. 고마웠던 인연, 즐거움을 함께했던 인연, 도움받았던 인연, 잠깐이라도 곁을 내어준 인연. 그 인연들을 떠올리니 진심이 서로에게 닿은 것 같아서, 그게 귀해서 조금은 슬퍼진다.
진심이 오갔던 상대는 말하지 않아도 이미 통하는 부분이 있다. 만남을 청하기 전에 먼저 연락을 주거나, 소소한 초대에 기쁨으로 응하는 상대를 보며 느낀다. 이 조직의 온도를 마침내 차갑지 않다고 기억할 이유는 함께 머물던 사람들로 인함이리라고.
운영 장교의 시간을 함께했던 현역 계원들도 잊을 수 없다. 이들 덕분에 나는 소대장 시절보다 간부로써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아갔다. 그 시절의 나는 소대원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지나친 부담과 미숙함에 번번이 좌절했지만 운영과 계원들을 만난 뒤 조금 더 성장했다. 우리는 케미가 잘 맞았던 것일까. 이들과 나의 관계는 많이 이상적이었다. 언제나 나를 성심성의껏 도와주고 진심으로 다가와 준 아이들. 마지막으로 이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 이들의 중대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함께 외출했다. 일부는 내 차에 싣고 일부는 택시에 태워 좋아하던 사람들과 방문했던 식당으로 갔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려는 찰나 모두 일어서더니 분대장 아이가 대표로 봉투를 하나 건넸다. 편지일까?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어쩌자고 이런... 현금이었다. 순간 안색이 변했을까? 분대장 아이는 설명을 덧붙인다. 감사함을 담은 선물을 준비하고 싶었으나 부대에서는 도저히 선물을 구할 수가 없었다고. 외출도 할 수 없어 약간의 마음이라도 담고 싶었다고. 표정에서 진심은 선명하게 읽혔다. 곧 점호시간이 되어가고 있었기에 일단 이들을 돌려보내고 나도 숙소로 돌아갔다.
이들과의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늦도록 일하던 시간, 야외 훈련의 날들, 외박 때 우연히 만났던 추억, 때로는 연애상담을 해주던 시간... 그 추억과 마지막 식사와 이들의 선물까지. 군인으로서 나는 언제나 행복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운영 장교로써 나는 행복한 사람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결론은 명확했다. 이들의 마지막 선물은 도저히 받을 수 없다. 진심만 읽은 뒤, 고민 끝에 선물은 이들의 중대장 편에 전했다. 직접 설명할 시간은 없었고, 중대장은 진중한 사람이니 현명하게 해결할 것이었다.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났다. 업무 인수인계도, 고마웠던 만남과의 마무리도, 그리고 짐 정리까지. 마침내 모두 끝났다. 남은 일은 하나. 떠날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