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番外). 마음은 개인의 영역

'우연'이 닿는 곳.

by 수진

(여자 군인의 가벼운 고백 19화 '사랑이 올까'에서 이어집니다.)


이 고백 괜찮을까. 군 생활과 관계없는 개인의 고백. 현재 관심사는 이것이니, 군 생활도 끝나가는 마당에 괜찮겠지. 그때그때의 관심사를 고백하는 거니깐.


그 친구는 나를 좋아했다. 처음 봤을 때 내가 마음에 들었고, 함께 교육받는 동안 지켜보았다고. 좋아했다고. 4년 전 우리는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눠본 적 없는데. 뜻밖이고 의외다.

다시 만나지 않았다면, 나에게 닿지 못했을 고백에 새로운 나의 면모를 알았다. 생각과 마음 그릇이 겉도는 면모라 해야 할까. 사람은 먼저 스스로 온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타인의 시선, 평가, 기대, 미움, 선호.. 자신을 향한 모든 것에 앞서 스스로 바로 선 뒤, 주변 시선을 참고할 수 있지만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고. 자신의 온전함이 우선이라고.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누군가 나를 좋아했고,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으로(저쪽에서도 호감이 4년 내내 지속되지는 않았다. 만날 가능성도 없었는데 당연하다.) 변함없던 나의 삶에 윤기가 더해진 느낌이다. 즉 타인의 시선에 따라 내 지난 시간에 윤기가 깃듦을 느끼며, 역시 나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선뜻 말하기 어려운 고백이다.) 물론 나 스스로 열심히 삶을 끌고 온 시간이 있으니, 전적으로 타인의 시선에 기대지 않고 그래서도 안 되겠지만.

훗날의 일이었지만 그 친구와의 재회로 나는 나의 것이 될 수 없었을지 모를 고백을 만났다.


나에게 그 친구와의 재회는 어땠을까. 교육기관의 첫 만남도, 오랜만의 재회도 우리가 능동적으로 의도했던 바는 없었다. 스키장에 가는 길이었다. 동기 부부와 함께 스키장에 가려고 날을 정했는데 그들에게 일이 생겼고, 그날은 그 해 스키장 마지막 영업일이었기에 둘이라도 가기로 했다.

4년 만에 만난 그 친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위가 되었지만 군 생활에 찌들어 보이지 않았고, 기억 속 앳된 흔적도 남아있었다. 함께 스키장으로 이동하던 차 안, 문득 감지했다. 얼마간 그 친구에게 호감이 있음을.

목적지 입력을 위해 내비게이션 이력을 검색하던 때였다. (그 친구의 차였다.) 별생각 없이 화면을 살피던 나는 어느 순간 화면을 외면했다.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면서 행여 어떤 흔적을 발견할까 봐 멈칫했다. 우리는 4년 만에 만났다. 이 동행은 우연이고, 다음에 관한 기약이 없다. 즉, 서로가 만나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호감이 있는 상대가 있는지 어떤지 모르고 알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 상황에서 이를테면 데이트의 흔적? 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지만. 굳이 알 필요도 없고, 어쩌면 알고 싶지도 않은 것을 발견할까 봐 찰나의 순간 나는 목적지 이력을 외면한 것이다. 짧은 순간 머리보다 빠르던 시선처리로 깨달았다. 호감은 본능의 영역이고, 머리보다 빠르게 몸이 알아챈다는 것을.

내가 잘못 생각했을까? 물론 아닐 수 있다. 아니어도 상관없을 것이었다. 착각이라 여기려던 느낌은 이내 드러나 이번에는 쐐기를 박는다. 둘 다 낯을 가려 음악 외에는 고요하던 차 안, 어색함을 없애기 위해 대화를 고민했다. 군 홍보 포스터 이야기는 어떨까? 그 친구가 홍보모델로 나온 육군 모집 포스터를 보고 반가웠다는 이야기.. 를 하려다 멈췄다. 나랑 상관도 없는 포스터 촬영 현장이 왜 떠올랐을까. 함께 홍보모델로 뽑힌 여자 동기들. 쟤 예쁘다고 일컬어졌거나, 눈에 띄어 나도 알던 아이들. 그 아이들과 함께했을 포스터 촬영 현장을 떠올리니, 굳이 꺼내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역시 이 고백도 어렵다.)

근데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행동하는 내가 익숙했다. 지금 이 자아는 내가 아는 나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나. 사람은 얼마만큼 자신을 위장하고 숨길 수 있을까? 생각지 못하게 튀어나온 익숙한 나를 보며 깨달았다. 아무리 긴 시간 전투복을 입고 군인을 연출하며 다른 자아를 입으려 해도, 그 위장을 해제시키거나 해제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면 본연의 모습이 나와버린다는 것을. 망설임 없이 본능적으로.

낯가리는 우리는 그렇게 조용히 스키장으로 이동해 함께 보드를 탔고, 조금은 친해져서 헤어졌다. 즐거웠다. 겨울, 밤, 눈 덮인 스키장, 야간조명... 더 필요한 게 있을까? 여운이 있는 즐거움이었다. 스키장보다 그 친구의 여운이 짙었다.

그 후 연락은 이어졌다. 다음에 관한 기약이 없어 외면하려던 영역. 그 영역의 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명확히 알게 되었고, 연락은 이어졌다. 계속. 계속. 쭉. 이어지던 연락은 다시 만남에 닿았다. 더는 우연이 아닌 의도한 만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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