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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mellperfumes Mar 22. 2023

한정판을 사지 않기로 했다

무엇이 남는가?

예전에 "향수의 함정"이라는 글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취미로 삼을 때 이것이 어떻게 소비중독이라는 병리적 행동패턴에 빠질 수 있는지에 대해 쓴 적이 있다: https://brunch.co.kr/@abaded695fd0401/34

최근에 나는 그런, 어떤 소비로, 내가 관련 물품을 얼마나 가졌는지, 관련해서 돈을 얼마나 썼는지에 대해 증명해야만 진정한 덕후다, 라는 압박이 싫었기에 소비를 더욱 줄이고 있다. 몸이 다시 아팠던 것도 있지만, 나의 진심을 "돈"으로만 증명하라는 트렌드가 지긋지긋했던 것도 있다. 사실 진심을 "돈"으로 증명하는 것은, 돈이 충분히 있다면, 아주 쉬운 일이다. 오히려 "시간"으로 증명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 돈은 사람에 따라 썩어남을만큼 넘쳐날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하루에 24시간, 1시간에 60분씩 주어진다. 그래서, 내가 1조원이 있다면, 한 10억원 정도 향수에 소비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내 삶에서 하루에 12시간씩 향수에만 쓰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백수라 하더라도 말이다. 자신이 현재 직업이 없어 직업에 매진하려 쓰는 시간이 남는다 하더라도, 직업을 구하기 위해 쓰는 시간이 나가며,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쓰는 시간이 또 나가고, 이 둘 모두 없어도 기본적으로 사람은 먹고 자고 싸고 씻고 이런 데에 시간을 쓰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는, 아주 비싼 물건보다, 아주 짧은 기간에만 파는 한정판이, 훨씬 더 매력적이고 내 진심을 증명하는 것 같고 자랑거리가 될 수 있게 된다. 한정판이면서 비싸면 금상첨화다. 아니면, 금방금방 단종시켜 버린다던가. 요새 대표적으로 톰 포드와 디올 프리베 라인의 향수들이 좀 이런 전략을 취하는 거 같다. 평이 좋은 몇 가지의 향수를 단종시켜서,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그 향수에 대한 열망을 키워가고, 잘 모르던 사람들도 궁금하게 했다가, 나중에 처음보다 훨씬 더 고가로 판매하는 것 말이다.


나는 더 이상 이런 전략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향수 브랜드들은 늘 한정판을 판매해왔다. 에디션 드 프레데릭 말, 세르주 루텐, 샤넬, 겔랑, 디올, 기타 등등.


 

출처: 모두 프래그런티카


여기서 든 예시는 전부 다 이미 현존하는 향수에 향수병만 다양하게 해서 한정판으로 내놓은 것이다. 즉, 향수 자체는 현존하는 향수와 다른 향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향수병의 디자인을 바꿈으로서 향수병을 수집하거나, 해당 병이 향이나 브랜드의 이미지를 잘 표현한다고 느끼게끔 하거나, 아니면 그냥 한정판을 샀다는 것을 자랑하게끔 할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향수병을 수집하지는 않지만, 이런 걸 모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정말 예쁜 향수병을 보면 감탄하곤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내가 문제삼는 문제는 한정판 디자인 향수병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향수를 냈다가 단종시키는 것이다.


물론 향수 회사에서 어떤 새로운 조합의 향수를 내고 싶은데, 향수 역시 상품이기 때문에, 얼마나 상업적으로 성공할지 몰라서 일단 시장 테스트를 하려는 방식으로 냈다가 좋은 반응을 얻고 계속 팔기로 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그 향수의 주 재료가 되는 어떤 재료가 한 해 작황이 아주 뛰어나서 그 재료에 의존하여 향을 구성했기 때문에, 이후에 그만큼 우수한 결과를 내지 못하는 재료를 가지고는 해당 향수를 만들지 못하여 부득이한 이유로 단종시키는 경우도 있다. 두 경우 모두 이해 가능하다. 생각보다 높은 호응을 받으면 계속 판매하는 것이 맞고, 후자의 경우 어떤 장인다운 고집스러움이 엿보인다. 브랜드의 어떤 역사적 성취나, 아니면 브랜드가 탄생한 곳에서 일어난 어떤 일의 기념을 위해 한정판을 만든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는 해당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해당 향수는 팔리는 기간에 제한이 있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요새 한국에도 런칭한 여러 향수 브랜드들이 하고 있는 짓거리를 보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예 새로운 향수를 낸 다음에 1년도 안되어서 단종시켜버린다. 이럴 때마다 이베이에 그 제품을 쳐보면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있고 가품이 판을 친다. 사람들이 향수 커뮤니티에서 평소에는 거론도 안되던 이 제품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얼마나 가치있는지 단종되어서 얼마나 슬픈지에 대해서 장황하게 글이 올라온다. 이제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그 향수에 대한 선망이 점점 커지다 어느 순간 조금씩 사그라들 즈음, 브랜드에서는 그 향수를 재런칭한다. 보통 가격은 "물가 상승"을 고려해서 훨씬 더 올라가 있고, 향도 이전과 같다고 말하지만 글쎄. 톰 포드의 보 드 주르, 벨벳 가드니아, 블랙 바이올렛, 종퀼 드 뉘, 기타 등등 여러 향수들이 이 방식을 고대로 따랐다.


향수는 향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 때문에 비싼 향수만을 찾는 풍조-소위 "향수 계급도"로 대표된다-는 솔직히 내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해당 계급도에 있는 위 쪽 브랜드의 향수들은 대부분 한국인이 좋아하는(사실 좋아하는 건지 다들 노동시간이 길고 여가시간이 없어서 오피스에서 쓸 만한 향수를 찾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옅고 미니멀리스틱한 투명한 느낌의 향수들이 주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해당 브랜드에서 굉장히 진하고, 강하고, 오래가며, 어떤 경우에는 고전적인 클래식 향수의 풍부함을 흉내내기도 하는데, 이것은 해당 문화권에서 그런 클래식 향수를 접하고 자라지 않은 대다수의 한국인에게는 기반 지식이 다르기 때문에 의아하게 느껴질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이런 태도로 살아가는 나에게, 잠시 반짝, 언제 단종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소비자 머리 위에서 다모클레스의 칼처럼 흔들어대는 마케팅 전략은 거부감을 넘어서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가뜩이나 향수를 더 이상 향이 좋아서 소비하기보다는 누가누가 더 비싼 향수를 쓰는지 경쟁하듯 소비하는 현 트렌드가 마음에 안 들어서 짜증이 나는데, FOMO를 자극하여 단종시키고 또 내고, 또 단종시켜버리고 하는 트렌드는 더욱 기분을 나쁘게 할 뿐이다. 그래서 앞으로, 나는 한정판 향수를 소비하지 않기로 했다.


여기에 더 덧붙이자면, 비싼 향수를 쓴다는 것은 당신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향수에 큰 돈을 쓴 것, 향수에 대해 조예가 깊은 것, 향수를 맡고 그걸 분석하고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은 죄다 다른 영역의 능력이다.


몇천만원짜리 향수 두 세병 있는 사람과 럭키센트 등 향수 샘플을 살 수 있는 곳에서 주기적으로 개당 5달러 하는 0.5ml 향수 샘플을 십몇개씩 사서 맡아본 사람 중 향수에 대해 더 많은 경험과 조예가 있는 사람은 단언컨대 후자다.


비싼 한정판 향수를 쓴다고 당신의 향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가? 비싼 향수를 샀다는 사실은 당신의 부유함 여부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당신이 마이너스 통장으로 향수를 샀는지, 12개월 할부로 향수를 샀는지, 카드 돌려막기를 하는 중인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냥 비싼 한정판 향수를 산 사람이다. 제발 좀 비싼 한정판 향수를 샀다고 다른 사람들의 안목을 싸구려라 폄하하거나 알못이라고 하거나 우월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반대로, 해외 니치 브랜드를 좋아하는 사람들 더러 사대주의나 허영심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여기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은, 향수의 가격이 향수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지, 어떤 니치 브랜드의 향이 좋아서 시도해보고 맞으면 사는 것은 좋은 일이다. 향수를 향 외의 다른 잣대로 평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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