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기준으로
장례식이 끝나고, 시아의 이상행동이 시작되었다. 갑자기 괴로워하며 소리를 지른다. “엄마 어딨어? 가까이 와.”라고 했다가 금방 “엄마 저리 가. 다 죽었으면 좋겠어.”라고 한다. 괴로워할 때 옆에 있어야 할지, 잠시 떨어져 지켜봐야 할지 난감하다. “엄마 여기 기다리고 있을게. 괜찮아지면 언제든 불러.” 최대한 다정하게 말했지만, 아이의 혼란스러움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초기상담에서 박사님은 ‘유년기 가까운 가족의 상실은 3도 화상을 입은 상처와 같다.’라고 표현하셨다. 화상은 치료하지 않아도 괴롭고, 치료 중에도 아프다. 아이는 엄마가 가까이 있지 않아도 불안하고, 엄마의 목소리를 들어도 여전히 불안하다. 당시 여섯 살 아이에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거운 짐이었을까. 회피를 배우지 못한 아이는, 모든 마음을 직면하면서 얼마나 괴로울까. 장례식 내내 우는 가족들을 보면서 얼마나 불안하고 외로웠을까.
아이를 이해하고 품어주고 기다려주는 일은 초반에만 잘 이루어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지쳐갔다. 아이는 길을 걷다가도 “엄마, 화장실 가고 싶어.”라고 말하며 소리를 지른다. 힘들게 찾은 공중화장실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가 나왔는데도 다시 들어가서 앉는다. 몇 번을 반복한 뒤에 옷을 자꾸 잡아당기며 불편하다는 표정과 말투로 짜증을 낸다.
매번 오은영 선생님이 될 수 없는 나는, 열 번 중에 여섯 번은 “불안하구나. 더 앉아 있어도 괜찮아.”라고 하지만 나머지 네 번은 친구와 다투듯 아이에게 소리친다. “그만해. 방금 갔잖아. 너 쉬 마려운 거 아니야. 화장실 가도 소용없어.” 그러다 열 번 중에 다섯 번, 세 번, 거의 받아주지 못하는 순간도 생긴다. 그때 내 마음속 기저에 있던 조급함이 고개를 내민다. ‘이 정도면 많이 받아줬잖아. 언제까지 참아야 해? 언제까지 받아줘야 해? 그만 불안해하자, 제발.’
가끔은 화를 내다가 “엄마도 힘들어. 좀 쉬자. 엄마 힘든 거 왜 몰라줘.”라며 아이와 엄마의 역할이 뒤바뀐 말로 투정 부린다. 잠든 모습을 보면서 미안해지는 패턴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하지만 정도는 더 심하다. 미친 사람처럼 화를 내고, 아이에게 미안해서 눈물이 난다.
사람들을 향해서 “내 회복에 간섭하지 마세요. 기다려주세요.”라고 부탁하면서 정작 아이의 회복에 간섭하고 있다. 아이에게는 많이 받아줬으니 그만하라고 하는 셈이다. 1년도 채 되지 않은 아픔인데 말이다.
아이도 말하지 않을 뿐, 부모를 향해 외친다.
“나한테 회복하라고 하지 마세요. 기다려주세요. 그냥 사랑해 주세요.”
아이는 사랑 그 자체, 사랑 덩어리이다. 나는 부모의 사랑으로 언젠가 아이가 회복될 수 있다고 믿는다. 믿음 때문인지, ‘나 정도면, 회복하라고 말해줄 수 있지 않나?’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부모가 아이를 위해 헌신하고 애정을 쏟은 정도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 정도가 아이의 기준이 아니라, 내 기준이라는 점에서 이미 힘을 잃은 생각이다.
그러다가 부모의 마음에 대해서도 이해심이 생긴다. (시) 아버지는 그저 우리가 일상을 되찾았으면 한다고 하셨다. ‘부모가 자식을 바라볼 때, 얼른 괜찮아져서 자기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은 어쩔 수 없어.’, ‘우리를 사랑해서 하시는 말이야.’ 그러니 부모님께 “아직 힘들지만, 저희를 향한 마음을 전해주셔서 감사해요.”라고 대답하고, 아이를 향해서 ‘이제는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길’하고 바라는 내 마음도 인정하기로 한다.
다만 노란색을 쓰기로 하면서 ‘사람마다 애도의 때와 방법이 다릅니다.’라는 문장을 마음에 새기기로 했으니 회복의 때가 언제든지, 기다려줄 수 있는 부모가 되자고 결심한다. 혹여나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이 사건에 대해 재 질문하고 인생의 길을 다시 계획해볼 수 있겠지만, 그때마저도 전적으로 아이의 마음에 집중할 수 있길. 이 기록이 그때 힘을 얻는 문장이 되어, 아이가 안전하고 행복할 수 있다면, 나의 때와 방법을 건네지 않길.
“아이는 천 번, 만 번 ‘좋은 말’로 가르쳐야 합니다.”
오은영 선생님의 육아서를 여러 권 읽으면서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내가 놓친 것은 없는지 생각했다. 천 번씩 좋은 말을 할 수 있는 성숙한 엄마가 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아이의 또 다른 문제를 걱정하기 바빴다. 돌아보니 나는 걱정만 많은 엄마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꼭 가르쳐야 할 일들이 많겠지만, 당장에 가르침보다 필요한 덕목-공감, 사랑, 경청과 같은-이 있다. 특히나 회복과 관련해서는 아이에게 가르침이 아닌, 충분한 시간이 필요함을 인정하자. 충분한 시간 안에서 조그만 변화를 보여줄 때, 함께 기뻐해 보자.
아이에게 어떤 변화가 있는지 살펴본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릴 때마다 완벽주의와 강박적인 모습들이 많았다. 조금만 삐뚤어져도 다 망쳐버리고 찢어버렸다. 조금만 묻어도 짜증을 내고 결국엔 그리지 않으려고 했다. 제주에 와서 놀이치료를 다녔지만, 아이는 놀이치료보다 미술학원에 다니고 싶어 했다. 요구에 따라 놀이치료는 중단하고, 학원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완성된 작품이 하나둘 늘어가고, 조금씩 그리기를 즐기기 시작했다. 그림에 대해 효능감이 생긴 듯, 이제는 자신감 있게 그림을 그린다. 어쩌면 아이가 보여준 큰 변화이다.
아이의 변화를 마음껏 기뻐하고 축하하자. 생각해보니 축하할 일이 많다.
그림 그리기 좋아하게 된 거 축하해.
어제 자면서 웃더라.
편안한 밤 보낸 거 축하해.
진짜 행복해서 웃는 순간을 축하해.
화장실 한 번 건너뛴 거 축하해.
제주에서 친한 친구 생긴 거 축하해.
유치원에 가기 싫었지만,
가서 즐겁게 놀고 온 날을 축하해.
제주에서는 예전보다 세 명이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많다. 붙어있는 시간만큼 자주 싸우기도 하지만, 아이 덕에 웃는 일도 있다. 주말마다 무엇을 하면 아이가 좋아할까 고민한다. 아이를 위해 바닷가도 가고, 오름도 가고, 체험도 한다.
하지만 아이가 집을 나서지 않으려고 한다. 아주 조금 낯을 가리고 부끄럼을 타긴 하지만, 원래 내향적인 아이는 아니다. 최근 들어 “집에 있을래. 집에서 놀고 싶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자신의 기준에서 위험 요소가 많은 밖에서 더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집이 좋아서인지 모르겠다. “집이 좋아.”라고 답하지만 정작 나가서 더 즐겁게 노는 모습을 여러 번 경험했기에, 또 “나가서 놀자.”라고 말한다. 아이가 ‘엄마 아빠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네. 즐거워.’라고 느끼는 순간이 올까? 그날을 위해 아이가 좋아하는 시간을 자주 가져보기로 한다.
아이가 좋아하는 시간은 이렇다. 가족들 모두 함께 보드 게임하는 시간, 그림 그리기나 요리하기, 오름을 오르며 벌레를 관찰하고 바닷가에서 소라게 만나기, 친구들과 함께하는 하루, 좋아하는 노래를 마음껏 부르는 무대, 잠수 실력을 뽐내는 물놀이, 손님이 찾아와 많은 사람이 집에 함께 있는 시간.
아이는 친할머니를 닮아 사람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을 챙겨주는 마음을 가졌다. 외향적이고 밝은 아이가 부모의 감정에 속아 자신의 감정을 모르고 자라지 않았으면 한다.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대할 줄 아는 아이가 부모의 분노에 속아 타인에게 함부로 하지 않기를 소원한다.
누군가 ‘나쁜 아이는 없다, 부모를 바꿔야 아이가 바뀐다.’ 했던가.
“엄마 아빠가 노력할게.”
결심해도 쉽게 바뀌지 않는 부모이기에, 수많은 날을 미안하다 사과하고 또 후회하며 밤을 지나겠지만 그래도 아이는 사랑이라서, 그저 고맙다.
아이만 바라봤기에, 아이의 모습을 그리는 일이 제일 쉬울 것 같았다. 그런데 어른의 입장으로 아이의 마음을 알기에는 한계가 있다. 아이가 커서 이 글을 읽고, “그때 내 마음은 이랬어.”, “그건 엄마가 잘못했어.”, “엄마가 많이 사랑해줘서 고마웠어.”라고 말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쓰고 나니 결국 아이에게 바라는 일들만 나열했다. 그래서 미안하면서도 또 한 가지가 생각나 기록으로 남기기로 한다.
지금 아이 덕분에 살고 있고, 아이가 없다면 절대 살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자라 가면서 이 사실이 부담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가 아이의 짐이 되지 않았으면. 그저 자신의 좋아하는 일을 찾고, 소소하고 작은 행복으로 하루를 채우고, 친구들과, 사랑하는 연인과, 때로는 혼자서도 만족하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길.
시아야, 너는 존재만으로 이미 나에게 충분한 사랑을 줬단다.
무엇을 하지 않아도 너는 이미 내 딸로 충분해.
언제까지 사랑하는 너와 함께할 수 있을지... 언제가 되었건 너는 항상 내게 가장 고마운 존재야.
네게 짐이 되기 전까지는 꼭 함께하고 싶다. 백 살까지 살기로 한 약속, 꼭 지키고 싶어.
그러니 언제까지나 엄마를 너의 마음에 짐으로 두지 말아 줘.
너의 모든 순간을, 너의 모든 모습을, 너라는 존재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
엄마 딸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다시 한번 사랑해. 또 사랑해. 언제까지나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