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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레트 Nov 02. 2022

"여보, 미안해."

시아버지와의 인터뷰 1

인터뷰는 만나서 그 사람의 눈을 바라보고, 표정의 변화를 느끼며, 몸의 떨림을 전달받으며 해야 하지만 사정상 전화로 했다. 인터뷰를 글로 정리하면서, 만나지 못해 아쉽고 앞으로는 더 많이 아버지와 대화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날은 일상적인 대화를 짧게 나누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질문해야겠다고 결심했기에, 첫 번째 질문이 나에게 가장 어려웠다.


 “아버지. 이 이야기를 끝까지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아버지도 저도 너무 힘들지 않을까 걱정돼요. 그래도 말씀해주세요. 처음 전화받으셨을 때, 어떠셨어요?”


아버지 “회사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의자에 앉으려 하는데, 엄마한테 전화가 왔어. 아주 높은 톤의 경상도 발음으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야. 이 사람이 장난 전화를 하나 싶었지. 나도 목소리를 높여서 장난으로 응대했어. 그랬더니 “전화가 튕겨 나갔는지 주워서 전화했어요. 지금 아기가 숨을 안 쉬는데, 엄마가 어딨는지 안 보여요. 여기 불도 붙어있고, 난리 났어요. 빨리 오세요.” 그러더라고.”

(아마도) 내가 어머니께 전화했을 때, 전화를 받았던 분이다. 그날 전화받았던 기억이 겹쳐서 아찔하다. 굉장히 긴장된 상태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는다.     


아버지 “어디냐고 물었더니 P 시장이라 하더라고.”

아버지는 분명 방금 집에서 손녀와 영상통화를 했는데, 어디까지 갔는지 감이 오질 않으셨다. 사고 현장을 자세히 설명해주는 전화 내용을 들으며 ‘장난 전화가 아니구나.’ 하는 판단이 서셨다. 알겠다며 끊고 급히 아들에게 전화하셨는데, 여러 번 해도 받지 않아 나에게 하셨다. 아버지 전화를 받고 시장으로 가면서 온몸이 얼마나 떨리던지, 그때를 돌이켜보면 꿈속 장면처럼 희미하다. 아버지가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도, 아들에게 전화하실 때도 그러셨겠지.  


아버지 “순간 집사람이 애를 데리고 어디를 걸었기에, 이렇게 되었나 싶어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어. 형제들에게 ‘교통사고가 났으니 기도를 부탁한다.’고 메시지를 보내고... 아들이 뒤늦게 전화가 와서 “시장에 가 봤지만, 수아랑 엄마가 없어서 구급차를 따라가고 있어.”라고 하더라. 운전해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딸이 전화 와서 같이 비행기 타고 내려가자 하더라고. 제정신으로 운전하지는 못했겠지. 지금 생각해보니 같이 비행기 타고 가는 게 맞는 거였어.”     


 “아버지도 수아만 사고 난 줄 아셨던 거죠?”

아버지 “그렇지. 그랬다가 택시 타고 공항으로 가는데, 라디오에서 ‘P 시장 사고로 두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는 뉴스가 나오더라. 형제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공항에 도착했지. 비행기 기다릴 때, 아들이 다시 전화가 왔는데, 가슴이 터져 버린 듯 울더라. 얼른 오라고 소리쳤지. 사망선고 듣고 나서, 엄마를 찾고 있다고 했어. 참 근데, 너네는 엄마 전화기 어디서 찾은 거야?”

 “저는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가 분명 같이 계실 텐데, 충격받아서 다른 곳에 가셨나. 어머니한테 무슨 상황인지 직접 들어야지 했어요. 그래서 병원 관계자한테 ‘같이 온 사람 없었냐.’ 물었더니 사람은 없고 핸드폰만 있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구급대원이랑 통화하면서 갔으니 아마도 그 아주머니께서 구급대원에게 핸드폰을 넘겨주셨나 봐요.”

아버지 “너네는 경찰에 신고하고 나중에서야 엄마는 바로 장례식장으로 갔다는 걸 알았구나.”

 “네. 충격으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그 이야길 들으니 더 믿기지 않았어요. 아버지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나 너무 무섭고 떨렸어요...”

아버지께서 우리가 어머니의 소식을 전하기 전에 이미 사실을 알고 계셨다는 사실에 놀랐다. 당시 많은 지인이 뉴스로 먼저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사고당한 이들이 본인이 아는 사람의 가족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함께 슬퍼하고, 한동안 트라우마를 겪었다. 모든 불안은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라는 점에서 시작된다. 많은 사람이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을 하면서 불안에서 벗어난다. 시간이 흘러 머리로는 알겠는데-사실 모르는데 알았다고 넘기는 중- 마음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아버지, 저희한테 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어떠셨어요?”

아버지 “비행기 안에서는 전화도 문자도 안 되잖아.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 ‘카드 정지시켜야 하는데... 지갑은 들고 있었나? 핸드폰도 정지시켜야지. 생각해보니 P 시장이 예전에도 자주 가던 곳이구나. 근데 지금 집에서는 거리가 먼데 언제 거기까지 갔지?’ 그런 생각 했었던 거 같아. 뉴스를 제대로 보고 나서야 엄마의 잘못이 아니란 것을 알았지만, 멈칫 놀라는 모습에서도 ‘순간 빨리 유모차라도 밀어 놔 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들었어.”     


모든 질문에 ‘모르겠어.’라는 답이 먼저 나오는 건 아들하고 판박이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는 더 구체적인 질문이 필요한데, 대화의 흐름에 맡겨보기로 했다. 장례식 때는 무덤덤했다고 하신다. 모두가 잠든 밤에 아버지의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충혈된 눈을 보았는데 우리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괜히 ‘무덤덤’이라는 단어를 선택하셨다고 느껴진다. 두 사람의 장례식을 같이 한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정신이 없다. 그때도 아버지는 여러 가지로 생각이 복잡하셨다. ‘원래 다음 주에 내려간다고 했었는데... 갑자기 빨리 내려가야 할 거 같다고 서둘렀지. 왜 그랬을까? 2주 전이었나... 애들 춥다고 같이 단열 벽지 붙여주고 오면 안 되겠냐고 물었는데, 차라리 그때 같이 내려왔으면 이런 일을 안 겪었을 텐데...’ 어떻게든 시간을 되돌려 헤어짐을 막아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동일하다.

아버지 “그러고 보니 내려가기 전, 함께 낚시하면서 엄마가 아이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거 같으니 조금이라도 지원해주면 어떻겠냐고 말했어. 근데 몇 달 전부터 적금을 넣기 시작했거든. 살면서 한 번도 넣어본 적 없는데 이제야 처음으로 넣었단 말이지. 그래서 전혀 여력이 없다고 답했는데 엄청나게 아쉬워하지. 자기가 빨리 일해서 도와주고 싶다고 안타까워했어. ‘그때 차라리 적금을 깨고서라도 소원대로 해줬으면 좋았을걸... 마지막 소원도 못 들어줬네.’ 하는 생각이 들어.”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 들을 때마다 마음이 저린다. 모든 게 내 탓처럼 느껴진다.      


잠시 아버지 회사에 손님이 찾아와 전화를 끊고 기다리는데, 온몸이 굳어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제대로 받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이걸 글로 쓸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든다.


‘그만하자고 할까.’


가족의 이야기를 쓰기로 했을 때, 처음부터 당연히 아버지도 있었다. 딸이 들어주는 아버지의 마음을 나도 들어주고 싶다. 집에 혼자 남았을 때, 그 마음이 어떨까. 외롭고 슬프지만, 어른으로서 있어야 하는 책임감도 덜어주고 싶다. 이야기를 마주하는 순간은 분명히 힘들지만, 나도 아버지에게서 덜어주고 싶은 그 책임감으로 인터뷰를 이어가기로 한다.   

아버지 “엄마가 퇴직하고, 비슷한 일을 하는 회사에서 일했었거든. 근데 갑자기 할머니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진 거야. 엄마가 병원에 자주 같이 가야 하니까 결국 회사를 그만뒀지. 할머니 치료에 집중했는데, ‘직장생활이라도 했으면, 너희한테 못 갔을 텐데... 회사 다니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

치매가 시작되어 나를 잘 알아보지 못하는 할머니를 생각하니 또 마음이 저린다. 온 가족이 할머니께 이 소식을 전하지 못해 한동안 거짓말을 해야 했다. ‘몸이 많이 약해지셨는데, 쓰러지시면 어쩌나. 자식을 먼저 보내고 그 아픔을 견디기가 얼마나 힘드실까.’ 온 가족이 할머니를 걱정했다. 3개월쯤 후에 모두 모였을 때 할머니에게 사실을 전했고, 할머니는 본인보다 자식이 먼저 간 아픔을 알게 되셨다.      


아버지는 장례식이 끝나고 한 번도 봉안당에 찾아가지 않으셨다. 살면서 원망했던 일, 상처받았던 행동들이 생각나 아내를 미워하셨다. 자식들에게도 엄마가 젊어서 했던 실수로 고생한 기억을 세세하게 이야기하셨다. 딸은 상담가에게서 ‘누군가를 갑자기 잃으면 떠나보내기 위해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말을 들었고 모두가 ‘아빠의 애도 방법이구나.’라고 이해했다.  

아버지 “아이들 키울 때, 남들처럼 해주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나이 먹고도 애들한테 또 짐을 줘야 하나. 왜 죽어서 우리 앞길을 가로막나. 애들 좀 놔줘라. 당신 때문에 애들이 얼마나 힘들어하는 줄 아냐. 왜 잘살고 있는 애들 붙잡고 있냐.... 그렇게 쏟아낼수록 원망하는 마음이 커지더라.”     


 “그럼 언제 처음으로 봉안당에 가셨어요?”

아버지 “6개월쯤 지나고 나서였나. 처음으로 봉안당에 찾아갔지. 그 후로는 매주 한 번씩 가고 있는데. 사진을 보면서 처음 꺼낸 말은 미안하다는 말이었어. 평생 양가 부모님 모시면서 어려운 살림에 살아준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해서 눈물이 나고. ‘자기는 가고 싶어서 갔겠나.’ 불쌍해서 또 눈물이 났지.”     

6개월 만에 처음 찾아간 봉안당에서 아내에게 처음 건넨 말은 원망이 아닌 사과였다.


“여보, 미안해.”

죄책감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모두에게 있다. 하지만 배우자에게는 거칠고, 따가운 죄책감이 느껴진다. 가장 가깝고, 편하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존재. 매일 식사를 함께하고, 고민을 나누며, 드라마도 함께 보고, 낚시도 함께하며, 내 옆에서 잠을 자는 친구이자 동반자. 싸우는 날, 서운한 날, 화나는 날도 많아서 상처 줬던 말, 힘들게 했던 일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후회로 가득한 밤도 있다. 아버지는 그런 마음을 매주 어머니 앞에서 이야기하셨다. 여러 번 말해도, 가벼워지지 않는 후회는 그리울수록 더 짙어지는 법이다. 아버지도 그러한 무게를 견뎌내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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