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와의 인터뷰 Ⅱ
나 “어머니가 제일 보고 싶거나, 힘든 날은 언제였어요?”
아버지 “추석 때,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으니 좀... 많이... 북받쳐오더라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린다. 덩달아 눈물이 나 잠시 침묵하다가 추석 때 가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턱 끝까지 올렸다 뱉지 못한다.
아버지 “결혼할 때 집도 없이 전세로 큰 방 하나에 미닫이문으로 칸막이 쳐서 살았어. 요즘에는 상상도 못 하지. 그때 아버지가 여든이 넘어 부양하느라 시부모님 모시고 살았고, 그 후에는 친정엄마 모시고 살다가, 그렇게 갔네.”
아버지는 그날 컴퓨터에 저장된 앨범들을 꺼내서 하나하나 보셨다. 이런저런 사진들이 세월을 담고 있다.
사진 속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모습을 한참 보다가 할아버지의 일생을 떠올렸다.
아버지 “우리 아버지가 천구백육 년생이야. 아버지 나이 아홉 살에, 나한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난하게 살수 밖에 없었겠지. 아버지도 참 고생 많으셨어. 해방되고 북한에서 김일성 반대운동이 있었는데, 함흥 정치범수용소에 큰아들이 잡혀갔다 하더라. 매일 아들 면회하러 가셨데. 근데 그러고 전쟁이 났으니... 미군 따라 피난 내려와서 늙으신 어머니, 아이들, 아내와 영영 이별할 줄은 상상도 못 하셨겠지. ‘작전상 후퇴라 피신 갔다 다시 오겠다.’ 약속했는데, 휴전이 되어버렸으니 답답한 마음에 매일 서울역을 찾아가서 언제 기차가 올라가나 기다리셨데. 결국 새로운 곳에서 정착해 매일 가족들의 소식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는데, 수용소에 있는 아들도 방공호에 숨어있던 가족들도 모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좌절되셨을까. 삶의 기반도 다 잃고, 피붙이도 다 잃은 아버지는 어떻게 나날을 견디셨을까. 그때는 많은 사람이 당한 일이라 해도 말이야. 우리는 식구 중에 두 사람 잃고 이렇게 슬퍼하는데 아버지는 나이 오십에 어떤 마음이었을까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들더라. 우리가 겪는 시험도 이렇게 큰데, 아버지는 어떻게 이겨내고 사셨을까... 그런 생각 하다가도 아버지가 태어났을 때도, 자랄 때도, 가난이 따라다녔는데 내 대에서도 가난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있다는 생각에 너희한테 미안했지.”
‘우리에게 한없이 멋진 아버지’라는 말 외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기다렸다. 그러자 아버지는 이어서 “우리 주변에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잖아.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헤어짐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뉴스에서만 보던 일이 우리 가족에게, 내 아내에게, 손녀에게 일어날 수 있냐고 물음이 생기기도 해.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왔다 갔다 하네.”라고 하신다.
아버지 “그러다 밖에 나가기도 싫어지더라. 사람 만나기도 싫고, 모임은 더 힘들고. 한 달에 한 번씩 등산하는 동창 모임이 있는데, 코로나가 잠잠하니, 등산하자고 두 달 전부터 연락이 왔어. 친한 친구가 자기가 데려갈 테니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나섰지. 장례식 이후 처음 만난 친구들이 많았는데, 처음에는 엄청 서먹해. 애들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게 눈에 보여. 내가 무슨 말을 해줄 수도 없고... 아무 일 없었던 듯 일상 대화만 하면서 산행하고 헤어졌지. 집에 돌아와서는 문득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는 게 너무 염치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회사 아니면 집에만 있으면서 텔레비전만 켜고 있지. 어떨 때는 텔레비전을 보는 것 자체도 짜증 날 때가 있어.”
아버지도, 딸도, 나도 똑같이 느끼는 감정들이 많다. 모두가 소중한 가족을 잃었기 때문일까. 똑같지만 다르고, 겪지만 시기가 다르고, 인정하고 표현하는 방법도 다르다. 누구든 자꾸만 뒤바뀌는 감정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염치없는 짓’은 없다는 말을 아버지께 해드리고 싶다. 이 말은 ‘괜찮아 보인다.’라는 말을 제일 싫어하는 나에게도 적용된다.
아버지 “그래도 나는 아직 직장을 다니니까, 일하면서 ‘모든 것을 잊어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우리는 억울하지만, 보편적인 일일 수 있고 우리보다 큰일을 당한 사람들도 있을 수도 있고.”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묻지만 신은 ‘왜 나라고 이런 일을 안 당할 거로 생각했느냐.’ 대답한다고 했다.
인터뷰는 몇 주 전에 했고 글을 이제야 마무리하면서, 이태원에서 일어난 사고 소식에 마음이 많이 무겁다. 우리 가족들은 크리스마스에 이별하게 되어 이제 더 이상 모두가 기뻐하는 날 기뻐할 수 없다. 이태원 사고로 인해 너무나도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더 이상 축제가 아닐 것이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 언젠가는 해야 할 이별, 꼭 오고야 마는 죽음.’ 죽음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밖에 이어갈 수 없나. 여전히 겪지 않은 더 많은 사람. 준비해도 갑작스러운 헤어짐. 필연성이라도 나는 여전히 살아있기에 느끼는 그리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나. 그러니 죽음에 대한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절망은 나를 둘러싼 우주가 흔들리는 일이다. 그러니 슬퍼해야 할 사람들을 위해 모두가 잠시 말을 아꼈으면 한다.
아버지는 ‘이제 일상을 찾아야지.’라는 말을 제일 많이 하셨지만, 소중한 가족이 없는 일상에 변화가 없을 수 없으며, 이미 일상을 살아가고 계시니 너무 서두르지 말자고 하고 싶다.
아버지 “결국엔 자녀들이 빨리 일상을 되찾고,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치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 빨리 받아들이는 게 현명할 수 있어. 사실은... 아들이 빨리 일했으면 좋겠어. 계속해서 좌절한 모습을 보이니, 부모 입장에서 안타까운 일이잖아. 당장은 힘들겠지... 그래도 내일을 위한 준비를 했으면 하는 거지. 앞으로 둘이서만 의논하지 말고, 방향이 설정되면 주변에 있는 조언자들의 조언을 들어봐.
나는 너희가 모든 걸 털고, 예전처럼 일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그게 엄마랑 수아가 바라는 걸 거야. 일상으로 돌아가는 건 노력이 필요하고, 의지가 필요한 일이야.”
이어진 신앙과 관련된 말들에 ‘이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도 자식을 잃어본 건 아니잖아요.’라는 생각이 스쳤다가, 사랑하는 아내와 손주를 잃고, 남은 자식들 걱정뿐인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한다. ‘그래. 아버지니까. 하실 수 있는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의 마음대로 해드릴 수 없어 죄송하다. 예전으로 돌아가는 건 연극이나 마찬가지라고 답했다.
아버지 “그리고 너희 요즘도 많이 싸우지? 엄마 왔을 때도 싸웠다며. 엄마가 얼마나 속상해했다고.”
나 “네. 어머니 앞에서도 싸우고... 왜 이렇게 싸우는지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아버지 “모든 걸 잊으라는 건 아니고, 끌어안고 살아야지. 그렇다고 연극처럼 살아가지는 말고... 아빠는 그저 너희가 예전처럼 살아가길 바란다.”
어머니가 계실 때 부부싸움했던 일, 이런 일을 겪고 나서도 계속 부부싸움을 하는 일, 여전히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는 마음에 더욱 무거워진다. 너무 무거워진 마음을 마무리하고 싶어 마지막 질문을 하기로 했다.
나 “.... 수아에게 하고 싶은 말 있으세요?”
아버지 “수아를 코로나 때문에 돌잔치할 때 마지막으로 보고 못 봤네. 영상통화로만 종종 하고 말이야... 수아한테는 짧은 시간이어서, 할아버지 노릇을 못 했어. 수아가 나를 할아버지로 생각해줄까?”
“알죠, 왜 몰라요.”
대답한 뒤에 수아를 데리고 자주 찾아뵙지 못했던 것이 또 죄송하다. 나는 왜 이렇게 죄송한 자식인 건지.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죄책감이 더해졌다.
나 “어머니께 하고 싶은 말은요?”
아버지 “그동안 나랑 살아줘서 고맙다는 말. 어려운 환경에서 이만큼 살 수 있었던 것도 엄마 덕분이고. 나는 너무 내성적이라 친구 사귈 줄도 모르고 그렇거든. 엄마가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 줬어. 멋있는 다른 남자를 만났으면 더 멋진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 거야. 좀생이를 만나서 아무 일도 못 하고, 사회활동하는 것도 좋아했는데 내가 싫어해서 못하고... 미안하네. 그동안 고생 많이 했어, 여보. 그렇게 말해야지.”
아버지를 인터뷰하고 나서 우울함이 찾아와 며칠을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 달려오느라 지쳤나.’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생각해보니 죄책감 때문이다. 어머니께 힘들다는 말만 하고, 도와달라고 연락했던 일이 후회되고 이 사고가 나 때문이라는 생각으로 괴로웠다. 게다가 지금도 부모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드리고 있는 사실 앞에 무너졌다. 아이 이야기와 아버지 이야기를 이어 쓰면서, 이기심을 보았다. 아이는 빨리 회복했으면 하고, 아버지에게는 우리를 기다려달라고 말한다. 내가 별로 좋은 엄마도, 좋은 자식도 아니라는 걸 인정하기는 싫고, 아이와 부모님을 향해서 죄책감이 들어 견디기 힘들었다.
아버지. 늘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꼭 저희 곁에 건강하게 살아계시면서,
기다려주세요.
아버지 얼굴 보면서 웃고,
오늘 점심 메뉴 같은 일상적인 대화도 하고,
가끔은 이렇게 마음속 무거운 짐들도
꺼내어 이야기해요.
죄송한 일 투성이인 며느리지만
제가 우리 시아를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하듯, 존재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해주듯
아버지도 저희에게 그런 마음이시죠?
아버지가 회복하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부모의 마음’이라고 여기며 들을게요.
하지만 우리 너무 급하게
서두르지는 말아요.
언제나 사랑하고 존경해요, 아버지.
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