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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레트 Dec 1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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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게 글쓰기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한 글자도 누르기 힘들다. 하고 싶은 말이 정리가 안 된다. 결국 핸드폰을 켠다. 한참 의미 없는 영상을 보거나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본다. 나에게 쉬는 시간 즉 비어있는 시간은 익숙하지 않다. 쉼이 재충전이라는 말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나에게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휴식은 불안을 불러오고, 불안은 좌절로 향하게 한다.      


늘 열심히 해도 글을 쓸 때 방해되는 마음이 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라는 생각은 허무함이다. 행위 자체가 덧없음이 느껴지는 질문이다. 그토록 기록에 집착하며 남기고 싶어 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글이 마음을 바라보게 하지만, 그 마음을 다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일까. 더 이상 그 마음을 깊이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일까.          


완성된 글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 ‘글의 짜임과 단어 선택, 시작과 흐름 결론까지 완성된’ 혹은 ‘어려운 일을 겪었지만 결국에는 이렇게 이겨냈다.’라고 완성되는 글을 뜻한다. 처음 쓴 글은 읽기 힘들 만큼 엉망이고, 필력은 단시간에 좋아지지 않는다. 어느 정도 가려지고 필터에 걸러져 수수께끼 같은 마음을 담은 문장은 나도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곧 1주기가 다가오는 힘든 시간을 걷고 있기에 ‘완성’은 여전히 먼 이야기이다. 완성이라니, 가끔은 출발도 안 한 느낌이다. 하지만 쓰다 보면 누군가에게 공감받기 위해서 해결되지 못한 문제도 답을 내고 싶어 진다. 독자에게 부담을 덜어주는 글이 되려면 해피엔딩이 있어야 할 텐데, 화려한 각본을 가진 드라마가 되지 못한다.      


흉내 낸 글이 마무리되고, 가짜라도 ‘완성’했기에 더 이상 그 마음을 바라볼 수 없다. 하지만 글이 마무리되어도 계속되는 마음이 있다. 어쩌면 더 깊어지고, ‘편협하게 글을 썼구나.’ 싶은 이야기는 나에게만 남아 표류한다. 외로움, 죄책감, 분노와 같은 감정들이 쉴 새 없이 나를 괴롭힌다. 모든 순간을 글에 담아낼 수 없다. 한 편의 글은 내 인생 전체를 나타낼 수 없고, 당장의 결심이 글을 마친 순간 바뀔 수도 있는 노릇이고, 글을 쓸 때는 미칠 듯이 싸웠지만, 내일은 서로 바라보며 웃을 수도 있다. 그런데 글을 쓰고 나면, 글이 내가 되고 내가 글이 되어 버린다. 조그만 상자에 갇혀 버린다. 책 한 권이 인생의 얼마를 담을 수 있을까?      


대표성을 띠게 될까 봐 겁난다. ‘자녀를 잃은 엄마’라는 타이틀은 매우 무겁다. 웃으면 안 되고, 밥을 잘 먹어도 안 되고, 잠을 잘 자도 안되고, 글을 써도 안되고, 일상생활을 잘해서도 안 된다. 막상 못하고 있으면 ‘이제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이 가만두지 않고 걱정하거나 가볍게 조언한다. 누군가의 대표가 되어서 괜찮아 보이면 안 된다는, 가벼워서도 안 된다는 마음이 든다. 그토록 내고 싶었던 완성된 결론을 억지로 쓰고 나면 누군가 글을 읽고 ‘1년도 안 된 일인데, 이렇게 생각하다니. 나는 왜 이렇게 어려울까.’ ‘아직 이렇게나 힘든데, 벌써 극복했다고? 말도 안 돼.’라는 생각이 들면 어쩌나. 내 마음은 여전히 엉킨 부분들이 많은데, 언제 다 풀어내나. 왜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없나. 그런데 엉망인 실타래는 써봤자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이야기가 아니지 않나. 결국 다시 제자리인 고뇌에 빠진다.      


“글쓰기라니, 너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성숙한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는구나.”


사람마다 애도의 방법이 다르다고 소리쳐봐도 내가 쓰는 글은 누군가에게는 ‘성숙한 방법’이 되어 있다. 글을 쓴다고 하면 대부분 읽지도 않고, 대단하다고 한다.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공감이 되어 위로와 용기를 주는 글이 된다면 그때는 대단하다는 말을 들어도 될까. 아직은 부담스럽다. 글을 쓴다는 건 어려운 일이 맞다. 하지만 글도 에너지가 있어야 쓴다는 말에 대해 공감하기 싫었다. 최근 아무리 해도 빠지지 않던 살이 빠질 정도로 굉장히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 에너지가 없으니 글을 쓰기 힘든 건 맞더라. 전에도 분명 힘들었는데, 글을 쓸만한 여유는 없었는데... 어떻게 글을 써왔지? 나는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쓴 걸까.      



글쓰기는 내가 삶을 살아가는 무기다. 무기는 꺼낸 사람만이 동기를 알 수 있다. 같은 상황이나 처지라도, 비슷한 마음이라 공감할 수 있다고 해도,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이다. 남편은 종일 영상 보기를, 아이는 솔직하게 말하기를, 시누이는 가족 챙기기를, 시아버지는 일하기를 선택했다. 글쓰기는 앞으로 삶을 살아가기 위한, 보호막이자 무기다. 안타깝게도 갈고닦지 않아서 칼날이 무뎌지고 결코 위협적이지도 못하지만 나를 지키고자 하는 최선의 선택이다. 누군가의 어떤 시기에 종일 울기만 하는 하루와 비슷한 결이다. 자연스럽게, 모든 상황과 만남이 맞으면서, 부담스럽지 않게, 시작하게 되었다.           


공개된 글은 누군가에게 읽힌다.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은 ‘대단한 용기’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누군가에게 읽히는 일이 두렵다. 두려움을 갖고도 매주 글을 쓰는 용기는 인정해줘야겠지. 두려움과 정반대의 감정이지만 누군가에게 읽힌다는 건 소속감도 준다. 외로움에 관한 글을 누군가가 읽으면, 내 손을 잡는 느낌이다. 그리움에 대한 글을 누군가 읽으면, 누구나 그리워하는 이가 있다고 깨닫는다. ‘함께 모여 쓰는 곳’을 만나며 매주 글을 쓸 수 있었다. 책임감이 강한 나에게는 숙제 내듯 하는 ‘매주 한 편의 글쓰기’가 도움이 된다. 게다가 부족한 글임에도 함께 울어주고, 공감해주는 이들이 있어 쉼터가 생긴 기분이다. 그들을 만나서 참 다행이다.      


무엇보다 글을 쓸 때 자신을 돌보는 느낌이 든다. 어른이 될수록 자신을 돌보는 일이 참 어려운데, 글을 쓰면 그 순간에는 가능하다. 평소에는 바라보지 못하는 마음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감정을 바라보게 한다. 쓰면서 깊어지게 한다. 쳐다보기도 싫은 감정이 있지만 쓰기 위해 잠시라도 바라봤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일도 글을 쓰면서 다시 가능해졌다. 가족들 이야기를 쓰면서 분노가 줄어들고 애도 방법 또한 받아들이게 되었다. 글은 나를 돌보고 소중한 사람들을 한 번 더 생각하게 한다.  


때로는 행복에 대한 설정값이 남들보다 적은 사람이라, 작은 일에도 기뻐할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며칠은 왜 주저앉아 울지 못할까, 종일 슬퍼하지 못할까, 쏟아내지 못할까 답답했다. 그러다가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하지만 내일도 없는 사람처럼 마음대로 하기도 했다. 밀려오는 죄책감과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외로움을 감당할 수 없어서 파도처럼 밀려올 때마다 닿지 않기 위해 뒤로 물러났다. 모든 순간을 담아낼 수 없지만, 매번 눈치가 보이지만, 허무해지고, 조그만 상자에 갇혀버리고, 두렵지만 그런데도 글을 발행시켰기에 인생의 부분이라도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 기록이란 나에게는 귀한 자산이다. 그러니 그동안 ‘대단하게’ 잘 써왔다. 앞으로도 대단하게 써 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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