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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Jan 14. 2024

게으름과 여유

직장인이 가장 좋아하는 날은 금요일과 토요일. 특히 밤 시간이다. 자고 나면 하루가 후다닥 지나는 것이 아쉬워 밤늦도록 잠들지 못한다. 그동안 못 봤던 tv 드리마를 몰아보기도 하고 특별히 할 일이 없으면서도 잠을 미룬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평일은 보통 늦어도 밤 11시가 되면 잠자리에 드는 편이지만 주말은 예외이다. 아침 시간에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것도 또 다른 이유다. 출근을 하지 않으니 밤 9시가 넘도록 침대에 누워 밍그적거려도 시비걸 사람도 마음의 부담도 없다. 그렇게 여유 아닌 여유를 부리다 보면 토요일 오전 시간은 누군가 시계의 시침을 몰래 빼버린 것처럼 빠르게 지나가버리고 만다. 


어제도 그랬다. 금요일 밤에는 하는 일 없이 12시가 넘어 잠들었고 그 탓에 토요일 아침은 짧아졌다. 눈을 비비고 거실로 나오자마자 전날 밤 읽던 책을 펼친다. 좋아하는 작가가 쓴 신작인데 예루살렘 기행기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세계사에 문외한임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건성으로 책을 읽다가 주말인데 모처럼 청소를 해야겠다 싶어 청소기를 돌리고 거실과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어둔다. 차가운 공기가 집안의 느릿한 기운을 살짝 흐트러놓는 느낌이 싫지 않다.


주말의 큰 숙제 중의 하나는 점심과 저녁 식사준비. 욕심껏 냉장고에 채워둔 야채 목록을 떠올리며 메뉴를 고민한다. 야채도 볶고 유통기한이 임박해 오는 두부에 양념을 넣고 자작하게 끓여낸다. 오랜만에 식구들이 머리를 맞대고 밥상에 둘러앉아 한가로운 점심을 먹는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아들을 역에 데려다주고 커피를 테이크아웃해 모처럼 시누이네 집에 가서 수다도 떨고 햇살을 등에 받으며 아파트 주변에서 산책도 한다. 저녁에는 떡만둣국까지 끓여 먹고 나니 시계 눈금은 벌써 저녁 7시가 넘어서고 종일 읽은 책페이지는 20여 쪽 안팎이다. 소파에 세상 편한 자세로 삐딱하게 앉아 "오늘 하는 일도 없이 다 지나갔네"라고 중얼거렸더니 딸이 오늘 종일 내 스케줄을 읊어대며 "왜 한 일이 없어. 이렇게 많은 일을 하면서 보냈는데"라고 말한다. 그랬나 싶기도 하면서 벌써 하루일과가 꿈결처럼 아득하다.


시간을 채우는 방법의 차이일까. 매사에 무언가 의미 있는 일로 채우지 않으면 종일 무의미하게 보냈다고 여긴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누군가를 만나거나 계획적으로 보내지 않으면 시간을 허비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주말에도 맘 편히 쉬는 일이 어색하고 불편하다. 당연히 늦잠을 자는 일도 익숙지 않다. 웬만하면 낮잠도 자지 않는다. 외출할 곳이 없어도 출근할 때처럼 준비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특별한 계획이 없는 날은 종일 책을 붙들고 씨름한다. 평일에는 진도가 잘 나가지 않고 많이 읽지 못하니 밀린 숙제처럼 읽는다. 때론 이 정도면 강박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사뭇 궁금해진다. 다른 사람들은 주어진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게으름과 여유의 차이. 아마도 판단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게으름이라고 여기는 시간을 누군가는 힐링 또는 충전을 위한 여유의 시간이라고 여길 것이다. 혹자는 휴일은 그렇게 보내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여기지만 누군가는 시간을 허비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누군가는 그토록 희망했을 새로운 24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눈을 떴을 때 이미 오전 8시가 넘어가고 있다. 무엇을 해야 하나 어떻게 채워야 하나 머릿속으로 시간표를 그려본다. 


나이 탓인지 체력이 떨어진 탓인지 8시간 넘는 수면시간에도 불구하고 몸은 무겁고 입술에는 피곤함의 상징포진이 자리 잡았다. 약사는 연고를 건네며 피곤함 때문이라며 쉬어야 한다고 면역력이 떨어졌다는 처방을 내린다. 여전히 게으름과 여유의 경계선이 궁금해진다. 나에게 게으름은 어디까지인지, 얼마 정도의 여유와 게으름이 필요한 것일까. 어제의 게으름을 상기하며 식탁에 앉아 모처럼 한 편을 필사하고 미뤄둔 글쓰기로 하루를 시작한다. 게으름은 여전히 나에게 불편한 단어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가끔은 더 가볍고 여유로운 일상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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