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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Jan 01. 2024

고마워, 그리고 애썼어!

앞머리는 올려서 높이 세우고 한껏 멋을 낸 듯 보이는데 촌스럽다. 탱탱한 볼은 이제 막 돋아난 연초록 잎새처럼 상큼함이 가득 배어있다. 며칠 전 고등학교 절친들 단톡방에 갑자기 빛바랜 사진들이 연달아 올라왔다. 오랜만에 추억소환이라도 하려는지 고교시절부터 대학 졸업식 때 학사복을 입고 함께 찍은 사진까지. 어느 때부터인가 편안하고 너그러운 몸매가 익숙한 친구는 언제 저런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날씬하고 멋진 포즈로 노래를 부른다. 짧은 커트 머리에 오동통한 내 곁에는 고2 때 같은 반이었던 그녀들이 환한 표정으로 웃고 있다.  


고2 때 같은 반이었던 그녀들과는 30여 년 넘게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어떤 이유로 친해졌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문과반이었고 성적이 비슷해 인근 대학에 같이 진학한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자주 얼굴을 보기는 어렵다. 가끔 서로 생각나면 카톡방에서 일정을 조율해 뮤지컬이나 콘서트를 보러 가기도 한다. 몇 해  전에는 해외여행을 떠나기도 했고 제주도와 부산 여행도 다녀왔다. 각자 자리에서 제 몫을 하려고 애쓰는 동안 어느덧 아이들은 성인이 되었고 직장에서도 사업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무엇보다 하고 싶은 일은 할 수 있을 만큼 경제적으로 작은 여유도 생겼다. 푸릇했던 그 시절 우리는 어떤 꿈을 이야기하고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영어 선생님을 엄청 좋아했던 친구는 영어교육과에 입학했고 영어 선생님이 되었다. 얼굴이 이뻐 학창 시절 내내 인기가 많던 그녀는 결혼은 안 할 것처럼 버티다가 고등학교 선배와 웨딩마치를 울렸고 잘 살고 있다. 단정한 단발머리 그녀도 좋아하는 그와 결혼해 어여쁜 두 딸을 키우는 커리어우먼으로 직장에서도 최선을 다한다. 셋 중에서 유일하게 시골에서 살고 있는 나도 비슷하다. 이제 아이들은 다 자랐고 세월의 무게만큼 주름도 늘었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 탓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나름 열심히 살고 있다고 믿으며 우왕좌왕하는 중이다. 최근 들어 병원 행이 잦아진 나를 보면서 베프 언니는 볼 때마다 신신당부한다. 이제 좀 쉬어야 한다고. 너무 바쁘게 살고 있노라고 말이다. 나는 사람에게서 에너지를 얻는다. 어쩌다 일정이 없으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으며 사람 속에 묻혀 있어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어찌 보면 쉬는 방법을 몰라서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집에 있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종일 그동안 읽지 못하고 미뤄놨던 책을 끼고 보낸다. 그리고 이내 할 일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것이다. 어수선해진 책장을 정리하고 어느새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정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추억의 사진들을 보며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그녀들과 약속을 정했다. 연말이 가기 전에 얼굴이라도 보자고 했던 터에 아예 시간을  맞춘 것이다. 그녀들은 멀리서 운전해서 가야 하는 나를 늘 배려해 준다. 연말이라 혼잡할 것 같다며 일단 만나서 택시를 타고 이동하자고 말한다. 복잡하고 낯선 곳에서 운전은 자신 없으니 이내 좋다고 승낙한다. 아버지 생신이라 점심은 어렵다는 다른 그녀의 약속 장소 근처에서 만나기로 한다. 미리 통화한 친구와는 처음부터 끝까지 건강이야기를 하다 전화를 끊었다.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안 돼서 6개월째 병원투어를 하는 친구, 독감으로 한 달 동안 고생한 자신이야기, 눈 수술을 받아 운전이 어려운 친구이야기까지. 아마도 오늘 만나도 대화의 80% 이상은 건강이 주제가 아닐까 싶다.


며칠 전 서점에서 책 두 권을 샀다. 마음이 어수선했는지 발품을 판 끝에 고른 책 제목이 '오십에 읽는 주역'이다. 점을 보러 가 본 적도 미신도 믿지도 않지만 이 책을 읽으면 왠지 세상사는 이치가 좀 보일까 하는 작은 기대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삶은 행운과 불행이 반복되는 과정이다. 그것을 아는 까닭에 가끔 좋은 일이 연속되면 괜히 불안해져서 조심스러워지기도 한다. 나의 행운이나 행복을 시샘하는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올 한 해 힘들고 다이내믹한 일들 때문에 힘든 날도 잠 못 이룬 시간도 많았지만 누군가에게 자꾸 자랑하고 싶어 입이 간지러울 만큼 기쁜 일도 많았다. 어려운 일들이 생길 때마다 옆에서 소리 없이 도와주고 응원해 주는 이들의 위로와 도움으로 잘 버텨낼 수 있었다.


이제 아쉽지만 한 해를 마무리하고 반가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여전히 건강은 나의 급선무 과제로 남아있고 하고 싶은 일들의 목록도 여전히 나의 가슴을 간지럽게 한다. 한도를 초과한 넘치는 마음은 반드시 후회를 부른다, 어울리되 휩쓸리지 말고 즐기되 우려하지 마라, 성실하게 궁리하되 집착하지 말라는 주역 구절들을 새기며 차분하게 내 발자취와 마음들을 되짚어 본다. 모두가 각자 인생의 일등이라는 문구를 읽으며 작은 자신감으로 어깨를 들썩여 보기도 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그녀들과 오붓한 수다에 벌써 미소가 지어진다. 오래도록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누군가가 가까이 있음에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어영차 힘을 내본다. 2023년 한 해도 너무 잘 살아줘서 고마워. 그리고 애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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