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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Jan 29. 2024

명퇴할 결심

"나는 정년까지 꼭 채울 거야"라고 호언장담했다. 순하고 선한 눈빛, 두 살 터울이라 사무실에서 직책보다 언니라는 호칭을 주로 쓰곤 했다. 오랜 근무기간 동안 최근 다른 부서로 발령 날 때까지 두 번 같이 근무했다. 어쩌다 사무실에서 우연히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눴고 부서가 달라진 후에도 문득 얼굴이 떠오르면 함께 밥을 먹었다. 그랬던 그녀가 얼마 전 명예퇴직을 냈다고 동료가 전한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깜짝 놀라 이유를 물었더니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는 답이다. 궁금증을 풀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이내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명퇴신청서를 제출했으며 수리될 때까지 장기재직휴가를 냈다며 인사를 하러 오겠다고 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요하고 잔잔한 표정의 그녀가 환한 표정으로 카페 안으로 들어선다.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와 달리 이미 마음의 결정을 한 탓인지 오히려 당사자는 편안해 보인다. 30여 년 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겠다는 말에 남편은 물론 직장 상사들도 제고할 것을 권유했지만 이미 마음을 정했노라고 평온하게 말한다. 마음을 굳힌 것도 최종 결단을 내린 것도 최근인 듯하다.


이제 일상을 어떻게 채울 예정이냐는 말에는 옅은 웃음으로 대신한다. 갑작스러운 결정이라면 스스로도 아직은 모든 것이 얼떨떨할 것이다. 같이 근무하던 즈음을 떠올리니 그녀와 소소한 추억들이 조약돌처럼 몽글거린다. 함께 밥을 먹고 노래도 부르고 차도 마시고 벌써 거의 10여 년 전이다. 내가 먼저 타 부서로 발령 났을 때 아쉬워했던 눈빛이 아직도 선하다. 최근 6개월 동안 같은 부서에 있다가 인사발령이 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더 애틋함이 서린다.  사무실이 달라 얼굴을 많이 보지 못해 더 아쉬움이 남는다. 갑작스런 결정에 조만간 함께 식사하자는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매일 일어나던 시간에 나도 모르게 눈이 떠지고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던 동료들의 얼굴이 당분간은 가슴 곳곳을 채울 것이다. 이 상황에서 내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녀의 결심과 행복한 인생 2막을 응원하는 것뿐이었다.


그녀의 결정에 비슷한 연배의 동료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갑작스럽지만 한편으로는 4년여를 남겨둔 현 상황에서 결단이 부럽다고도 말한다. 직장을 끝까지 다닐 수 있는 비결 중의 하나는 갚아야 할 빚이 많은 것이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지만 책임져야 할 무언가가 아직도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면 툭툭 털어버리고 직장문을 나서기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음을 안다. 이제 아이들도 제법 자라서 제 몫을 하고 있고 여전히 직장에 열심히 다니는 남편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발걸음을 조금 더 가볍게 하는데 일조했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아마도 한동안은 그녀의 명퇴 소식이 동료들의 작은 관심사가 될 것이다.


그녀의 명퇴 소식을 들으며 손가락으로 나의 퇴직일자를 헤아려 본다. 가끔 불거지는 퇴직 연장이 현실화된다면 아직도 거의 10여 년을 직장이라는 틀에서 보내야 한다. 지금 상황에서는 상상만 해도 아득한 햇수이다. 마음이 어수선할 때마다 공연히 더디게 늘어나는 퇴직금의 숫자를 들여다보며 이곳만 벗어난다면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질지 모른다고 상상한다. 아침에 기상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되고 수시로 벌어지는 예측 불가한 일들에 긴장하거나 머리 아파할 일도 없는 신세계가 펼쳐질 것이라 믿는 것이다. 


유리지갑임을 자처하는 샐러리맨들에게 '저 이제 퇴직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호기롭게 직장을 나서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짜릿한 로망 중의 하나이다. 간혹 저 문을 나서고 나면 절대 일이라는 것은 하지 않고 질릴 때까지 놀아야지 맘을 먹으며 버티는 날도 있다. 30여 년 넘게 일했으면 충분한데 민간인이 되어서도 일을 한다는 것은 이해불가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 퇴직한 선배들은 10명 중의 8~9명은 똑같은 말을 한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어딘가 갈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노는 것도 3개월이 딱 좋다고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 말에는 공감하기 어렵다. 어딘가에 다시 매이는 삶,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출근한다는 자체가 고역스럽다고 여기는 탓이다.


올해로 80세가 되신 엄마도 비슷하다. 엄마의 숙제는 잘 노는 것이다. 사 남매는 그녀가 어딘가에서 일을 하려고 하는 것도 일하겠다는 결심에도 늘 못을 박는다. 지금은 일을 할 나이는 아니며 그냥 편하게 놀고 즐겁게 지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래도 일은 조금 하고 싶다며 여운을 남긴다. 자식들이 귀에 딱지가 생길 만큼 잔소리를 해도 그녀에게는 시간을 보낼 장소, 매일 아침 어딘가 향할 곳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일은 일상이고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 만남의 장이요 소통의 자리인 듯하다. 누군가는 이토록 지겹고 힘겨운 자리라고 여겨지는 일터도 누군가에게는 그저 그런 무료한 하루에 활기를 불어넣는 행복한 일상이 될 수 있구나 짐작해 볼 뿐이다.


오늘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사무실의 일상이 반복된다. 하루종일 전화벨이 울리고 같은 말을 내내 반복하며 '선생님'을 불러대는 직원들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명퇴 신청서를 제출하고 사무실을 나선 그녀에게 전화라도 걸어봐야겠다. 그녀의 마음은 지금 무슨 색깔일까. 어떤 계획들로 채울 준비를 하고 있을까. 그녀의 명퇴할 결심에 따듯한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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