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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Mar 12. 2024

시인 없는 출판기념회

구부정한 백발의 노인이 오늘도 습관처럼 옆구리에 가방을 끼고 들어선다. 조금 센 바람이라도 불어 제치면 훌쩍 날아가 버릴 것처럼 휘청대지만 눈빛은 젊은이의 그것보다 훨씬 형형하다. 아버지로 아들로 남편으로 직분을 다하고자 하루도 쉼 없이 전투하듯 일생을 보냈던 그에게 시는 새로운 삶을 열어 주었다. 어느 날 우연히 접한 나이 지긋한 시인의 강좌는 그를 시인의 길로 이끌었고 80세를 넘겨 시인의 삶을 살다 얼마 전 별이 되어 떠났다. 아직 온기도 식지 않은 그의 다섯 번째 시집은 사방을 두리번거리지만 그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주인 없는 출판 기념회를 준비하는 무대 한편 빈 공간에 시집만 고즈넉하게 앉아 발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


지역에 있는 문화원에는 70대가 넘은 어르신 수강생이 제법 많다. 50대가 가장 젊은 축에 들 정도이니 많은 정도가 아니라 대다수가 어르신들이다. 특히 시를 쓰는 강좌에는 몇 년째 출근 도장을 찍고 있는 모범생들이 다수이다. 나이가 들 수록 감성이 무뎌지고 건조해질 것 같은데 신기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수강생 중에 많은 분들이 등단하고 시집까지 출간해 출판 기념회를 열어 놀라움을 자아낸다. 기대치 없이 무심코 읽다가 깜짝 놀랄 정도로 동심이 가득한 동시는 물론 인생의 관록이 그대로 배어나는 은은한 생활 시로 감동을 선사하는 것이다.


나 또한 글을 쓰고 싶다면서 문화원에 들락거리고 창작 강의를 얼씬 거린 지가 벌써 햇수로 한참이다. 하지만 여전히 실력은 백면서생의 수준. 바쁘다는 핑계로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중도 포기한 날이 많았고 진심으로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뜨겁게 달려든 적도 없다. 오히려 나이의 앞 숫자가 바뀔 때마다 체력 운운하며 엄살을 피기 일쑤인 날이 더 많다. 좀 더 전문적으로 해볼까 싶어 관련 학과에 편입했지만 2년 동안 합평회에 제대로 참가한 횟수는 손으로 꼽을 정도이고 기말고사 때마다 과제와 시험에 전전긍긍하며 간신히 졸업장 하나만 추가했을 뿐이다. 


최근 들어 글쓰기가 더 소원해졌다. 무언가 머릿속에 스쳤을 때 바로 써 내려가야 하는데 그 시기를 놓치는 날이 많고 시간이 경과한 후에 쓰다 보니 마무리를 못하고 중도 포기한 꼭지도 여럿이다. 브런치 글을 발간한 지도 벌써 한 달여를 넘기는 실정이 되다 보니 처음 가입 승인을 받던 희열의 순간과 급상승하던 조회수를 보며 가슴 떨리던 그날 또한 아득할 지경. 마침내 수시로 브런치에서 알려오는 알림은 게으른 나를 더욱 압박하는 역할을 하기에 이르렀다. 매일 글을 쓰고 수시로 브런치북을 발행하는 이들이 경외롭다. 아니 부러운 마음이 더 크고 깊다는 것이 정확하겠다.


시집을 출간한 시인 당사자가 없는 출판기념회는 단출하지만 따스한 시간으로 채워졌다. 7년여 동안 시창작을 가르치며 동고동락했던 선생님의 추모사와 낭송가들의 시 낭독. 아버지에 대한 가장 많은 그리움과 추억을 갖고 있는 아들의 회고의 시간까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던 사회자는 시에 대한 노 시인의 열정이 많은 이들에게 시를 사랑하는 마음과 선한 영향력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며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또한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을 것이라는 말로 애도를 대신했다. 


요즘은 피곤하다는 이유로 퇴근 후에 넋을 놓고 앉아 바보상자에 정신줄을 빼앗기는 시간이 더 늘어났다. 글을 쓸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고 머릿속으로는 써야 한다는 압박감은 널을 뛰지만 정작 몸으로는 방치하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쓴다는 것은 삶에 대한 사랑이다. 특히 나 자신에 대한 진한 마음이요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 때론 기쁨의 단어들이 춤을 추기도 하고 어떤 날은 한없이 침잠하는 생각의 조각들을 하나씩 조용히 붙여가는 시간이다. 이제 마음이 시키는 일, 하고 싶어 에너지를 쏟아야 할 때다. 별이 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는 노시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엉뚱한 일에 시간을 허비하며 여전히 핑계 찾기에만 더 열심인 내 모습이 부끄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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