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공동체 속에서의 타자 인식: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인터넷과 SNS의 등장은 한 인간이 살아오면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의 수를 무한히 늘려 놓았다. 현대인은 이전 세대와 비교해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짧은 시간 안에 습득할 수 있다. 이는 곧 나와 비교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직간접적으로 접하게 되면서 우리는 타자의 삶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혹은 내가 적어도 저들보다는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비교하기도 한다. 비교는 타자에 대해 가졌던 생각을 가져와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교의 기회가 늘어날수록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의 기회도 늘어나게 된다. 또한 아름답다는 것은 내 눈에서만 그렇다는 것이 아닌 타자의 눈에도 그렇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가 더 많이 연결될수록 타자와 나를 더 많이 비교하게 되고, 자신을 성찰하며 나의 삶이 그들만큼, 혹은 그들보다 더 아름답기를 바라게 된다. 이렇듯 현대인의 아름다운 삶에 대한 논의는 전 세대 대비 무수히 확장된 타자들에 대한 논의를 함축하게 된다. 따라서 타자들과 더 많이, 더 밀접하게 연결된 이 사회에서 아름다운 삶에 대한 논의는 과거 대비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아름다운 삶은 어떻게 재정의 될 수 있을까? ‘더 많은 타자들과의 조우’를 중심으로 이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타자 혹은 타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하게 있었다.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자아를 도출한 이후 서양 철학에서 세상은 주체와 객체로 나눠지게 되었다. 주체와 객체로 나눠진 세상에서 객체는 생각하는 자아인 주체가 인식하는 대상이었지만, 그 객체가 타자였던 경우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타자라는 객체는 주체가 될 수 있다. 타자가 주체가 되는 경우, 원래 주체였던 나는 그 타자에게 새롭게 객체가 된다. 주체와 객체로 이뤄진 나의 세상은 타자의 존재로 인해 허물어지고 새롭게 재구성될 수 있다. 나는 나의 눈을 보지 못하고 타자의 눈만이 나의 눈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도식에서 내가 세상을 인식하는 시야는 타자에 의해서만 확인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은 타자와 나의 위치를 바꿔 상호연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언제나 타자에게 새로운 타자가 되어준다.
타자의 존재는 나의 세상 밖으로부터 오지만 동시에 나의 존재를 발견하게 만들기에 신비로운 것이며 근원적으로 낯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비로움과 낯섦이 아름다움을 낳는다. 가령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압도되는 느낌이 드는 건 그 작품을 통해 작가라는 타자의 세계를 방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듯 예술작품의 가치를 작품 그 자체가 아닌 타자에게 부여하는 것은 단토가 말한 예술의 종말과 결을 함께 한다. 아름다움의 관점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이전보다 더 많이 조우하게 된 타자들에게 의존하는 다원주의적 관점을 따르기 때문이다. 뒤샹의 <샘>이 예술 작품이 되었듯, 이제 무엇이든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는 시기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도 충분히 예술로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푸코가 주체의 재구성을 말하며 실존미학을 주창한 것도 이해될 수 있다. 주체의 존재 확인은 앞서 말했듯 객체인 타자들에 의해 수행될 수 있다. 또한 무언가를 재구성하려면 그것이 이미 구성되어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그렇다면 주체의 재구성을 위해선 주체가 어느 구성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는지 타자들에 의해 파악될 필요가 있다. 즉, 주체가 아름답게 살아가기 위한 재구성을 수행하기 위해선 타자가 우리의 삶에 접속하는 면모를 고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헤겔이 사랑을 변증법적으로 설명했듯, 사랑은 ‘나’라는 정명제와 ‘타자’라는 반명제가 얽혀 드는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방식이다. 사랑은 어느 순간 찾아와 내 마음을 사로잡은 상대방을 한없이 신비롭고 아름답게 만든다. 이러한 황홀경에 대해 플라톤은 그 대상을 이미 천상 어딘가에서 만났던 적이 있다고 이해한다. 우리가 대상과의 첫 만남이라 여기는 것도 사실은 감격스러운 재회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황홀과 친밀감의 아름다운 신비를 해명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내 삶에 나타난 가장 강력한 타자인 사랑을 향해 언어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감정을 갖는다. 타자를 조우할 수 있는 기회가 늘었다는 것은 사랑에 빠진 감정을 느낄 기회가 늘었다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 감정을 삶에 적용시켜 행동함으로써 이전보다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
타자에 의해 삶이 변화하는 모습은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을 통해 다른 방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앞선 사랑에 대한 논의가 삶의 아름다움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켰다면, 노동에 대한 논의는 삶의 아름다움을 부정적으로 변화시킨다.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자와 자본가로 나눠 이해될 수 있다. 이 시스템 속에서 ‘나’라는 노동자는 ‘타자’라는 자본가에 의해 주체성을 잃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인간을 유적 존재로 보며 인간이 세계에 자기의 목적을 실현하는 주체적인 존재로 이해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인간의 주체성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생존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인간은 유적 존재로부터 소외되게 된다. 많은 타자들과 조우하게 된 노동자들은 서로의 경제적 상황을 비교하며 강화되는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 ‘살아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마르크스의 견해에 따르자면, 주체성의 회복이 곧 아름다움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논의한 대로 아름다움의 가치가 타자들에게 달려 있다면, 주체성을 잃어가는 다양한 타자(노동자)들이 공동체적으로 주체성을 회복하여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삶을 함께 재구성하는 기회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힘은 인간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 본래적 조건인 죽음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언젠가 죽을 것이 선고되어 있는 존재이다. 죽음은 인간의 전제 조건이자 인간의 끝을 상징하는 것이다. 생명에 있어 죽음이란 결코 비켜갈 수 없는 사건이기에 생명체란 죽음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죽음을 인식함으로써 우리가 주체성을 상실한 비본래적인 존재에서 주체성을 회복한 본래적인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이데거는 죽음 앞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것을 용기 있게 인수하면서 일상적인 가능성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신의 본래적인 가능성을 선택하는 ‘죽음의 선구’를 말한다. 그렇다면, 더 많은 타자들과의 조우는 타자들이 ‘죽음의 선구’를 통해 회복하게 되는 더욱 다양한 주체성들을 나로 하여금 인지하게 만들 것이다. 타자가 죽음을 맞이하여 보이는 주체성은 나의 밖에서 오는 것이기에 일종의 신비로움과 낯선 성질을 가지고, 이는 앞선 논의에 따라 아름다움으로 이해될 수 있다.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일종의 죽음-공동체를 형성하게 만든다. 따라서 현시대에서 무한히 확장되는 죽음-공동체 속에서 인간들끼리 연대하여 주체성을 회복하려는 아름다운 시도가 필요할 것이다.
인간은 살아지는 게 아닌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이미 완성된 그림이 아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백지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또한 삶의 도화지는 홀로 채우는 것이 아닌, 타자와의 연대를 통해 함께 채워가는 다채로운 색의 향연이기에 더욱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죽음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노동 소외로 인해 잃은 주체성을 회복하며, 사랑을 황홀히 여기며, 스스로의 삶을 타자로 구성된 죽음-공동체 안에서 예술 작품으로 재창조한다면, 우리는 아름다운 삶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