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어떻게 살지?

어떤 인생은 위로가 된다

by 범람


남들은 어떻게 살지?


서른 초반을 보내고 있는 요즘, 나는 답지 않게 걱정이 많아졌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 잘 살고 있는 걸까?> 하고 의문이 든다. 카카오스토리나 유튜브 속 수많은 인생들을 자꾸 곁눈질한다.

어쩌지? 나는 저 사람처럼 살지는 못하고 있는데. 그렇게 많은 걸 알지도 못하고 돈도 많이 모으지 못했는데. 그런 불안감이 끝없이 피어오른다. 어디를 둘러봐도 인생이 미완성인 사람은 없는 듯하고 나만 도태된 것 같다.

그러다보면 괜히 이유를 찾는다. 저 사람은 원래 집이 유복했고, 타고나기를 재능이 있었고, 예쁘고 잘생겼고, 좋은 지인이 있었고, 운이 좋았고, 실패해도 되는 기회가 있고....... 구질구질하고 열등감 가득한 시선이 된다. 내가 왜 이렇게 후진 생각을 하고 있나 자책할 만큼.


그런데, 최근에 그 비슷한 말을 지인 A가 나에게 했다.

'넌 하는 것마다 잘 됐으니까 그렇게 쉽게 생각하는 거지. 난 무서워서 못해. 좋겠다.'

이때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다 자부했고, 또 그만큼의 열등감마저 갖고 있던 내게 일명 <대가리 꽃밭> 취급은 정말이지 낯선 일이었다. 가히 신선했다. 묘하게 우쭐한 마음도 들고, 네가 내 인생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는 반발심도 들었다.

그 끝에 종착역은 반성이었다. 사실은 나도 똑같았으니까. 타인의 생이 무작정 굴곡 없이 평탄해 보였던 것도, 나만 사연이 있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도.


누구에게나 자기 인생은 참 특별하다. 나 역시 내 인생을 참 특이하다고 생각해 왔다. 나에게 삶은 누군가 죽으라며 등 떠미는 생 같다가, 꼭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듯 행운이 찾아오는 예측 불가의 나날이었다. 잘 되는 것 같으면 넘어지고, 엎어진 채로 파묻히려 하면 누군가 손을 내미는 이상한 굴레가 자꾸 되풀이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기쁜 일이 있어도 아주 기쁘지가 않고, 슬픈 일이 있어도 그렇게 슬프지가 않다. 어차피 어떤 성공과 좌절도 금세 끝나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들어버린다. 이래서 사람들이 '인생사 새옹지마, 롤러코스터, 전화위복' 같은 말들을 하는구나 싶다.

그런데 다들 그런 말을 한다는 건 대다수가 비슷한 경험을 해 봤다는 소리다. 나는 내 인생이 참 특이하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지인 A가 그랬고, 내가 그랬듯 우리는 무의식중에 남의 삶을 납작 눌러 보니까. 나만 특별한 줄 알고 사니까.


그 깨달음은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내가 특별치 않다는 좌절감보다는 다행이라는 안도가 먼저다. 다 이렇게 사는구나. 다들 힘들다가도 행복해지고, 여유롭다가도 초조해지는 삶을 사는구나. 어떤 동지가 생긴 것처럼 그걸 아는 것만으로도 묘한 힘이 생긴다.

그래서 내 인생을 써보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보다 편하고 쉽게 잘 사는 것만 같은 수많은 '나'와 A들을 위해. 나만 고군분투하고 애쓰며 사는 것 같아 외로운, 그래서 자꾸 타인의 생을 힐끗거리게 되는 사람들을 위해.

'남들은 어떻게 살지?'에 대답해 보기로 했다. 남은 모르겠고, 일단 나는 이렇게 살았다고.



죽으라는 소망을 이겨줘서 고마워


여자는 열네 살에 집을 나왔다. 술만 먹으면 큰소리 치는 아버지와 데면데면한 새엄마, 득시글한 여섯 형제를 피해 나왔다. 그 덕에 준비물 살 돈이 없어 매일 벌을 서야만 했던 학교도 더 이상 가지 않았다.

거처도 없이 무작정 집을 떠난 여자는 만두가게에서 일을 했다. 매일 열기에 푹푹 찌는 가게에는 손님이 붐볐다. 2층까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여자는 마른 다리로 하루에도 수백 번씩 좁따란 계단을 오르내렸다. 힘들었지만 숙식이 제공되는 가게였기에 아주 오래 버텼다.

별다른 기술도, 힘도, 학력도 없는 여자가 살기에 꽤 팍팍한 세상이었다. 여자는 이곳저곳을 떠돌아가며 일했다. 베 짜는 공장이나 식당에서 하루에 열두 시간씩 근무하며, 친구를 사귀고 술과 담배를 배웠다. 돈은 모으지 않았다. 적은 급여로 월세와 생활비를 충당하면 남은 돈은 쥐꼬리였고 여자에게는 기대되는 미래가 없었다. 하루 벌어 하루. 어차피 티끌인 돈, 참고 모으기보다는 당장 눈앞에 있는 즐거움과 자유를 누리고만 싶었다.


그렇게 이십대 중반이 된 여자는 한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백칠십 초반 키에 어깨가 다부지고 체격이 좋았다. 성격은 꽤 불 같은 면이 있었지만, 웃는 얼굴이 수더분했고 여자에게만큼은 자상했다. 여자가 먹고 싶어하고 하고 싶어하는 것은 다 해주려는 남자였다. 두 사람은 아주 쉽게 사랑에 빠졌다.

사실 믿음직한 사내는 아니었다. 남자는 배에 커다란 용 문신이 남은 건달이었고, 마음 잡고 다른 일을 해 보겠다 하는 것마다 줄줄이 실패했다. 몰래 대마초에 손을 대는 날도 있었다. 그래도 여자가 불같이 화를 내면 무릎을 꿇었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 약속했다. 그 강한 남자가 제 앞에서만큼은 약해졌기에 여자도 속절없이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사랑 앞에서 이성은 너무 무딘 칼이었다.

두 사람은 평택에 작은 반지하 방을 얻었다. 풍족하지 않았지만 여자에게는 처음으로 가진 자신만의 울타리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는 남자가 유부남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에게는 부인뿐 아니라 아들과 딸도 하나씩 있었다.

여자는 배신감을 느끼고 헤어지려 했지만, 남자는 끈질기게 붙잡았다. 어디로 도망을 가도 귀신같이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남은 사랑과 두려움 때문에 여자는 다시 평택으로 돌아갔다. 남자는 그녀를 극진히 대하다가도 피임약을 보면 노발대발 화를 냈다. 지금 부인과는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고, 진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싶은 사람은 너다. 이런 건 먹지 말아라. 빌다가 역정을 내다가 약을 탈탈 털어 버리기도 했다.


여자는 결국 임신을 했다. 담배도 뻑뻑 태우고 술도 궤짝으로 마셨는데, 그래도 애를 가졌다. 물론 알게 된 후에도 여자는 담배를 끊지 않았다. 지울 용기는 없었으면서도 차라리 이대로 아기가 사라지기를 바랐다. 가진 것도 없이 덜컥 유부남의 애를 가져버린 상황이 두려웠다.

게다가 비슷한 시기에 몇 달 차이로 남자의 본부인 역시 임신을 했다. 남자의 절절한 고백마저 다 못 믿을 것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남자는 실수였다며 빌었고, 여자의 무딘 칼은 이번에도 그를 잘라내지 못했다. 어차피 여자는 혼자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결국 아기는 팔삭둥이로 태어났다. 하도 상태가 좋지 않아서 의사는 '태아가 죽은 채로 나올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했다. 여자는 죄책감에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아기를 낳았다. 1.6kg의 미숙아는 살갗이 투명해서 빨간 피부가 죄 드러났다.


그런데 숨이 붙어 있었다. 인큐베이터에 들어가면 살 것 같다는 말에 여자는 당장 일어났다. 워낙 시골이라 인근에 인큐베이터가 있는 병원이 없었고, 두 시간 가까이 차를 타고 달려서야 겨우 입원을 시켰다.

간호사는 여자더러 '이모예요?' 하고 물었다.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엄마예요.' 하니까 간호사가 기함을 했다. 애를 낳자마자 이렇게 걸어다니면 어쩌느냐고, 당장 누워 있으라며 난리였다.


그래서 우리 엄마는 아직도 걸핏하면 다리가 쑤신다. 그렇게 죽었으면 했던 아기를 살리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흔적으로, 무릎과 골반이 쿡쿡 쑤셔댄다.


인큐베이터 비용은 하루에 18만 원이었다. 아빠의 각종 사업 비용을 대느라 온갖 보험을 모두 해지했던 엄마는 하루에 18만 원을 쌩으로 부담해야 했다. 회사원 평균 월급이 60만 원 수준이었던 90년대 초에 두 사람은 당연히 그 비용을 부담할 수가 없었다. 너무 힘들어, 하루는 아기를 퇴원시켜 집에 데려왔다.

아기는 아직도 붉기만 했다. 살갗은 투명하고 너무 연약해 보였다. 손이라도 대면 그대로 죽 밀려 벗겨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엄마는 포대기에 둘러 놓은 나를 그대로 한참 바라만 보다가 다시 병원에 데려갔다. 한 생명의 무게는 생각보다도 더 무거웠다.


한참 후에야 나는 인큐베이터를 벗어나 평택 집으로 갔다. 엄마는 갓난아기인 나를 눕혀놓고 곧잘 자리를 비웠다. 옥상에 빨래를 널러 가기도 하고 찬거리를 사러 나가기도 했다. 원래 아기는 눕혀 놓으면 그대로 가만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 나잇대 아기들은 몸을 뒤척이다 엎어지면 숨구멍이 막혀 죽기도 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를 만큼이나, 우리 엄마는 육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이었다.


그래도 나는 행복했(을 것이)다. 사랑을 듬뿍 받았으니까.

아빠는 내 이복형제들이 태어났을 때와는 다르게 나를 정말 예뻐했다. 집에서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던 사람이 손수 분유를 타고, 똥기저귀를 빨았다. 장난으로라도 혼내고 화낸 적이 없었다. 오죽하면 딱 한 번 엉덩이를 한 대 얻어맞은 내가 하루 종일 서럽게 울 정도였다. 걸핏하면 파리채로 혼을 내던 엄마에게는 맞고도 5분 만에 애교를 부려댔으면서, 아빠가 호통친 날에는 세상이 뒤집힌 듯 굴었다. 어떻게 아빠가 나를 때리느냐고, 아빠 밉다고, 엉엉 울어대는 어린 딸을 달래느라 아빠는 식은땀을 흘렸다. 엄마도 자기가 혼내던 것은 모조리 잊은 듯이 아빠를 몰아세웠다. 네가 뭔데 내 딸을 때려! 매서운 외침과 서러운 울음 사이에서 아빠는 며칠을 쩔쩔매야 했다.

그쯤 우리 가족은 참 구질구질했다. 추한 불륜 가정이었던 데다가 가난했고 집도 좁았다. 매일 내 분유값을 걱정하고 쌀이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며 살아갔다. 그래도 나는 그때가, 우리 엄마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직은 우리가 우리였고, 희망이 남아 있었던 때.



(이어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