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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꼽 Jul 27. 2023

출생의 비밀

02


'사람마다 저마다의 별에 살고 있다지, 그렇다면 난 벌레 먹은 별에 살고 있나 봐.'


밤하늘을 보고 있으면 왜인지 갑갑함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지만, 감상에 젖어들기는 싫었다. 나는 나약함을 혐오했다.


사람들은 나에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티가 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귀티가 난다고도 했다. 시내 보세 골목에서 오천 원 주고 사 입은 원피스에 비슷한 수준의 가방을 들었는데 그런 걸 볼 줄 아는 안목이 없던 이십 대 초반 대학생들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그래도 듣기에 나쁘지 않아 그냥 그런 척하며 지냈다. 어설픈 연기에도 사람들은 그럭저럭 속아 넘어가 주었다.




나는 폭력가정에서 자랐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우리도 평범했으니까.


사고 이후,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의처증이 생긴 아버지는 수시로 엄마를 울렸다. 나도 열두 살 즈음부터 납득이 되지 않는 이유로 혼이 나고 때로는 얻어맞았다. 가끔 아버지가 죽는 꿈을 꿨다. 장례식장에서 나만 울지 않아서 어떻게든 눈물을 짜내려 애썼는데 되지 않던 꿈. 어린 나이였지만 이 모든 게 행복의 반대편 어디쯤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불가에서는 자식이 부모를 선택해서 오는 것이라 했지만, 그런 말도 증오했다.

어떤 머저리가 자기를 때리는 부모를 선택할까.


학창 시절 내내 줄곧 반장을 놓치지 않고, 장기자랑 시간에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춤을 추던 나는 사실 누구에게도 이 불운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쩔쩔 매고 있었다. 모두에게 티 없는 10대처럼 보이고 싶었다. 친구들처럼.


사춘기가 오기 한참 전부터 나는 방에만 있었다. 문만 열면 어둠 속에 앉아있는 아버지를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퇴근하고 오신 아버지의 눈은 유난히 공허했다. 때로는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감고 있기도 했다. 적막을 깨줄 엄마가 집에 돌아올 시간은 항상 멀기만 했다. 얼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벗어나는 날만을 기다렸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의 외면 그대로 살아보고 싶었다. '밝고, 명랑하게.' 서울로 가버리려는 나에게 아버지는 원서비를 주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차선이었던 곳으로 떠났다.




고요하게 눈 뜨는 아침과 타인에 의해 기분이 좌우되지 않는 평정에 곧바로 매료되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시리얼을 한술 뜨는 장면마저 리듬감이 넘쳤다. 드디어 숨을 시원하게 들이켜고 뱉을 수 있게 되었다. 내 방문 바깥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루를 스스로 열고, 닫는 일에 행복해했다. 하지만 내 작은 공간은 가끔씩 새로운 공포로 물들었다. 모르는 사람이 술 취해 현관문을 두드리기도 했고, 낯선 사람이 관심을 가장해 뒤따라 걷기도 했던 것이다. 자유를 운운하며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운 자신이 바보 같았다. 독립은 자유를 누릴 권리에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정신력이 더해진 개념이라고 뒤늦게 정의를 내렸다. 이따금씩 엄마가 그리워서 울었다. 전화를 걸어 물으면 엄마는 늘 잘 지내신다고 했다. 아버지도 나를 보고 싶어 하신다고 전해 들었지만, 아버지에게는 전화하지 않았다.


어린이날이 되면 아버지는 대답도 없는 나에게 5만 원을 부쳤다. 아무 날이 아니어도 가끔씩 10만 원씩 보내곤 했다. 나는 갖고 싶은 재킷이 생겼을 때야 겨우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아빠가 준 비상용 카드로 이거 사도 되냐고' 물었다. 엄마의 성화에 겨우 몇 달에 한 번씩 집에 내려갔다. 그리고 내 뿌리가 생기 없는 회색빛이었다는 걸 재확인하고 황급히 돌아서곤 했다.


타지 생활을 하며 외로움에 절여진 나는 가끔씩 집을 떠올렸다. 그놈의 외로움이 회색 캔버스에 색을 입히고 있었다. 좋았던 것만 떠올리게 했다. 엄마의 품, 엄마가 해주시는 따뜻한 밥, 그리고 형제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머리가 어떻게 되었던 걸까,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표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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