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아이가 나를 닮은 것만 같을 때
엄마는 대외적으로 아주 사회성 만렙에 쿨한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예민하고 여린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엄마의 육아방식은 온탕과 냉탕을 오갔다. 온탕에서의 나는 ‘우리 예삐’였는데 냉탕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꿀밤’이 날아들었다. 어떻게 하면 검지 관절로 그렇게 아프게 쥐어박는지 신기하다는 생각은 방금 든 것이고 얻어맞을 당시에는 상당히 굴욕적이었다.
그때 내가 혼난 이유들은 대개 이랬다. 너무 어리숙하고 여리게만 행동해서, 답을 알고 있어도 손을 들고 대답하지 않아서… ‘나의 부족한 용기’가 엄마를 실망시켰던 것 같다. 나이를 먹고서야 그게 ‘내 모습에서 엄마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엄마를 용서하기까지는 한참 걸렸다. 물론 엄마를 너무나도 사랑했지만 ‘그땐 왜 그랬어?’식의 감정은 참 오래갔다.
유아들은 판단에 의하기 보다는 타고 난 기질대로 행동한다고 한다. 그런데 콩만이를 거의 세 돌 가까이 키우고 보니 점점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착잡하다. 살면서 자신을 그리 예쁘게 본 적이 없었는데 사랑하는 내 딸이 내 성격을 조금 닮은 것 같단 말이다.
‘너도 앞으로 참 고단하겠다.’ 싶다가도 ‘그래, 내가 너의 기질을 존중해 주고 필요한 만큼의 정서적 연료를 채워주면 될 일이야.’ 싶기도 하다. 아주 다중이가 따로 없다. 인간관계에서 내가 겪은 상처나 시행착오를 콩만이는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시행착오는 콩만이에게 도움이 될 테다. 또한 여러 육아서에서 이야기하듯이 타고 난 기질을 존중받으며 잘 자란다면 나보다 훨씬 성숙하게 매 상황을 잘 헤쳐나갈 것이다.
나는 평생 ‘나는 왜 이럴까?’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콩만이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길 엄마로서 간절하게 바란다. 그러려면 우선 ‘엄마, 그때 왜 그랬어?’의 상황을 최대한 만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
‘내가 겪었으니 너를 이해해.’라는 마음으로 움츠린 녀석의 어깨를 감싸주는 엄마가 되고 싶다. 순수한 영혼의 만 2세 꼬마가 원하는 사랑의 모양을 늘 고민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