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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아민 Sep 20. 2022

[포토에세이] 산책길의 쉼표

자연이 주는 위로

머리가 아프거나 생각이 복잡할 때 나는 푹신한 신발을 야무지게 신고 밖으로 나간다. 해가 쨍쨍한 낮이나 달이 반기는 밤이나 상관없이 그러하는 편이다.


요 근래에 아파트 주변으로 오솔길이 생겼다. 울퉁불퉁한 길에 천을 깔기 시작할 때는 어떤 길이 만들어질까 무척 기대되기도 했고 이 좁은 곳이 뭐 그리 멋지게 만들어질까, 괜히 예산낭비라며 조소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의 시작을 알리는 팻말이 땅에 박혔고 그 뒤엔 잡초들이 정리되고 있었다.

막상 접근을 금지했던 비닐선이 사라지니 많은 사람들이 오갈 거라 여겼던 곳엔 이전처럼 낡은 의자만 입구에 여러 개 깔렸다.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어르신들의 만남의 광장이 되었다. 아직 예쁜 꽃도 볼만한 장식도 없어서인가 그 길을 거니는 사람은 드물었다.


주말 오후, 집에 있기 갑갑하고 숨이 막히는 느낌에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옷을 갈아입었다. 신발을 신고 아파트 중앙문을 나섰을 때 고민했다. 매일 가던 산책로를 갈 것인가 길 건너에 있는 작은 시냇길을 걸을 것인가.

그러다 문득 새로 생긴 오솔길이 떠올랐다. 아, 한 번 가봐야겠다.


아파트 뒷문으로 나가니 바로 입구가 보였다.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고 하더니 제법 바람이 소란스러웠다.

길게 깔린 푹신한 갈색 천에 한 발짝 내디뎠다. 그냥 맨 흙바닥도 푹신할 텐데 천까지 깔려있으니 찌르르 통증이 와야 할 무릎이 편했다. 아, 왜 이곳에 어르신들이 많이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왼쪽으로는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날카로운 소리가 오른쪽엔 문을 여닫는 생활소음이 그리고 내가 걷고 있는 길엔 이름 모를 새소리와 바람에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마른 나뭇가지가 땅 위에 내려앉아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콧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숲의 냄새에 잠시 멈춰서 사진을 찍었다.

나무, 풀, 새, 땅, 흙만 가득한 이곳이 왜 이토록 좋은 걸까. 분명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정신없이 헤집어놓는데 왜 이토록 푸근하게만 느껴지는 걸까.

발에 와닿는 땅의 기운을 느끼며 내 눈에 스민 싱그러움을 느끼며 코로 들어오는 자연의 냄새를 맡으며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걷기 시작한 지 10분 정도 지났을까. 첫 번째 벤치가 나왔다. 탄탄해 보이고 색이 바랜 곳도 없었다.

대신 누군가 머물다 간 흔적은 벤치 아래 가득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길을 인생이라고 친다면 이제 20대이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떠나가고 그렇게 자연스레 흔적을 남기는, 쉬기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20대의 청춘. 20대엔 내가 쉴 수 있는 곳이 있어도 건강한 몸과 마음을 자부하면서 그냥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굳이 이곳이 아니더라도 다음 휴게소가 있을 거라 막연하게 생각하면서 말이다.

곧이어 풀보다 나무가 우거진 곳이 나왔다. 여기저기 솔방울들이 너부러져있고 노랗게 변한 나뭇잎들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한 발짝씩 걸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길 중앙에 있는 솔방울 하나를 발로 툭 건드렸다. 수분 감 없이 가볍게 아무렇게나 굴러갔다. 솔방울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40대로 보이는 남자가 힘 없이 앉아있었다. 두 손으로 핸드폰을 꼭 쥐고 간간히 한숨을 내쉬었다. 오후 3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땅바닥을 훑고 지나가는 강한 바람에도 고개를 들지 않고 멍하게 핸드폰을 쳐다봤다. 초입도 아니고 길의 끝도 아닌 곳에서 그는 어깨를 둥글게 말아 쉬고 있었다.

숲길의 끝에 거의 다다랐을 때 오솔길 옆 인도길에 앉아있는 어르신이 보였다. 의아했다. 푹신한 흙길을 놔두고 왜 딱딱한 바닥으로 걷다가 앉는지. 쓸쓸해 보이기까지 한 어르신을 보며 묘하게 슬퍼졌다.

나는 어르신의 뒤에 조용히 서있었다. 핸드폰도 하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고 누군가와 말도 하지 않고 한동안 그렇게 앉아 계셨다. 그저 조용히 오가는 사람도 없는 길에서 일어났다 걷다 앉았다를 반복하며 쉬고 있었다.

이제 곧 끝이 보일 것 같았다. 고작 30분이란 시간 동안 내 머리는 맑아져 있었다.

울퉁불퉁했던 길을 걸었고, 사방에서 날아오는 자연의 냄새를 맡았고, 좁고 넓은 초록의 나뭇잎을 눈에 담았다. 그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골치 아팠던 머릿속이 비워져 있었다.


숲길을 산책하다 보면 많은 것을 느낀다. 매번 똑같은 풍경인데 매번 다른 걸 느낀다.

사계절을 반복하는 자연을 보며 참 꾸준하다는 생각을 하고

매년 생채기가 생기는 나무줄기를 보며 참 안타깝다는 생각도 한다.

밟히고 밟혀 땅에 짓이겨진 잡초가 어느새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을 보며 독하다는 생각도 하고

바람 따라 날아간 씨앗이 땅에 심겨 싹을 틔울 땐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숲길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기 때문이다.

머릿속을 꽉 채운 걱정도 불안한 마음도 그저 자연에 비해 한낱 부스러기일 뿐임을 알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뭘 그리 완벽하려고 했을까. 우주의 작은 먼지일 뿐인 내가 뭘 그리 다 담으려고 했을까.

숲에 오면 쓰레기로 꽉 찬 머릿속이 비워져 홀가분해진다.


벤치에 앉아 자연이 주는 위로를 받고 있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힘이 난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 때, 쉬고 싶을 때 나이에 상관없이 산을 찾고 숲을 찾고 바다를 찾나 보다.

저마다 쉬는 방법은 다르지만 쉬는 곳은 언제나 자연 속이다.


그러니 제발, 양심이 있으면 아니, 없어도 산이든 바다든 길이든 쓰레기 좀 버리지 말자!

청소부가 치워주는 데 뭐 어때라는 생각도 하지 말고!

아, 급발진했다. 다시 숲길로 산책을 나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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