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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아민 Nov 17. 2022

친정이 불편한 이유

가부장적인 아빠

결혼을 하고 나니 때마다 양가 부모님을 찾아봬야 하는 일들이 많이 생긴다.

명절, 어버이날, 양가 생일 등.

결혼한 지 이제 1년 조금 넘은 나로선 아직은 시가보다 처가가 편할 거라 생각하는데 전혀 아니다.

시가는 처가든 각자 다른 이유로 불편하다.


시가는 시가이기 때문에 불편하고 처가는 분위기가 불편하다.



어릴 때부터 우리 집은 모든 게 아빠 중심으로 돌아갔다.

기상시간, 아침 먹는 시간, 식사 메뉴, 자는 시간 등등.

우린 전부 아빠의 눈치를 봐야 했고 아빠의 호통이 시작되면 난색을 표하며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땐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다. 가부장적인 집안 분위기가 당연한 줄 알았고 엄마조차도 아빠 말에 순종하며 살아갔으니까. 그런 집안 분위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한 건 내게 사춘기가 오고 나서였다.


거실에서 엄마와 TV를 보고 있는데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을 남성이 성폭행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엄마와 나는,


"쯧쯧, 저 미친놈 콩밥 좀 먹어봐야 돼."


라며 성폭행 가해자를 욕했다. 그때 TV 소리가 시끄럽다며 방에서 나온 아빠는 그 뉴스를 보며 한마디 거들었다.


"저래 짧은 치마를 입고 밤에 싸돌아다니는데 성폭행 안 당하고 배기겠나. 하여간 여자들이 문제야. 나 잡아 잡숴하는데 누가 저걸 안 건드려. 괜히 남자만 욕먹는 거지."


그 말은 내 가치관 전체를 흔들었다. 평소 여성을 비하하는 말을 서슴지 않게 했던 아빠였고, 엄마는 으레 그렇듯 대꾸하지 않고 넘어갔다. 워낙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라 딸인 내가 반박한들 늘 콧웃음만 쳤다.


그런데 그 말은 아니었다. 딸을 키우고 있는 아빠가 할 소리는 아니었다. 나도 밖에 나가면 교복 치마를 입고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면 밤늦게 귀가했다. 자신의 딸도 성폭행 피해자가 될 수 있는데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거지?


"아빠 사상이 썩었네. 성폭행한 새끼가 잘못한 거지 치마 입고 밤에 돌아다닌 게 잘못이야?"

"뭐? 썩어? 그럼 여자가 홀딱 벗고 밤에 돌아다닌 게 잘한 거가! 여자가 말이야 해 떨어지면 집에 들어가야지!"

"나도 교복 치마 입고 야자 끝나면 밤에 집에 오는데 그럼 나도 성폭행당해도 되겠네?"

"그래! 저렇게 옷 입고 다니면 당하겠지!"

"... 와, 아빠 미쳤네, 돌았어. 딸 키우는 아빠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


그날 처음으로 아빠에게 강력하게 대항했고 분노에 휩싸인 아빠의 얼굴을 봤다. 그랬겠지. 하찮은 여자 주제에 딸 주제에 엄마도 가만히 있는데 감히 내가 눈을 부릅뜨고 대드니 얼마나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겠어.

하지만, 난 그날부터 아빠의 분노 버튼이 되기로 했다. 여성을 비하하는 말을 하면 바로 꼬집어 대들었고 엄마를 함부로 대하는 모습이 보이면 못났다고, 세상에서 제일 한심해 보인다고 자존심을 건드렸다. 속 시끄럽다고 그만하라는 엄마에게도 화를 냈다. 그저 순종적으로 아빠가 주입한, 잘못된 가치관대로 살아가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도 짜증이 났다.


"엄마가 그러면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딸은 엄마 보고 배운다는데 내가 그런 취급이나 당했으면 좋겠나?"

"넌 나처럼 살지마. 너는 똑똑하고 배운 게 많으니까 네 주장하면서 살아."

"엄마도 똑똑해! 소중한 사람이야. 나보다 더 가치 있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내가 뭐가 똑똑하노 배운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그냥 아빠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조용히 사는 게 마음 편하다. 나는 늦었고 니나 잘 살아라."


엄마는 항상 그랬다. 자기는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이고 지금 이대로 사는 게 제일 편하다고. 그때는 내가 우리 집안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계속 잡아내고 말하면 아주 조금이라도 바뀌지 않을까... 착각했다.


결혼하기 전, 그 당시 예비신랑인 남편을 데리고 집에 인사를 하러 갔을 때 남편을 배웅하며 아빠가 건넨 말이 있었다.


"자네가 뭘 하려고 하지 말고 딸한테 다 시켜."


그 말로 아빠에 대한 내 존중은 완전히 끝이 났다. 아빠 눈엔 남편이 날 챙기는 것도 부엌에 잠시 들어가 상을 들고 나왔던 것도 탐탁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도 엄마처럼 남편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꼭두각시가 되길 바라는 것 같았다.


다행히 남편은 그 말을 듣고 내가 가부장적인 남자에게 가진 반감을 이해하게 됐고, 자신은 그러지 않겠다 다짐하는 계기가 됐다.


며칠 전에 엄마 생신이라 본가에 다녀왔다. 남편이 미역국을 끓여 가져 갔다. 힘들게 집에서 음식 하지 말고 밖에 나가 사 먹자고 했지만, 아빠가 반대해 어쩔 수 없이 집으로 갔다. 본인 생일 인대도 엄마는 여전히 부엌에서 음식을 하고 있었고 나는 집에 가자마자 부엌으로 가 엄마와 같이 고기를 굽고 국을 끓이고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오랜만에 딸 내외가 온다고 이것저것 많이 준비하셨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괜히 뭉클해졌다. 하지만, 사위 사랑 장모라고 나보단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한 게 퍽 웃겼다. 대신 내가 좋아하는 아귀찜을 시켰다.


밥을 먹으면서도 아빠는 연신 엄마가 모자란 부분에 대해 비난을 했고 엄마는 묵묵히 밥을 넘겼다. 남편이 없었다면 난 바로 아빠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한마디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남편에겐 장인어른인데 그 자존심까진 건들 순 없었다. 밥을 먹는 내내 아빠는 남편에게 알아듣지 못할 말을 했고 상 치우는 걸 도와주러 온 남편을 끌고 가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는 거 아니라며 나무랐다. 어이가 없었다.


남편은 생신날에도 음식을 하고 부엌일을 하는 엄마가 안됐는지 내년엔 밖에서 식사하시자고 말했고 아빠는 밖에서 먹는 건 싫다며 단호했다.


"아니 엄마한테 물어봤잖아. 엄마 힘들게 집에서 먹지 말고 내년부터는 밖에서 먹자."

"난 뭐 상관없은데 너거 돈 많이 쓸까 봐."

"됐다! 뭘 밖에서 먹노. 집에서 먹으면 되지!"

"그럼 아빠가 장보고 재료 다듬고 밥하고 요리하고 치워. 그러면 되겠네."


내 말에 아빠는 딸은 저래서 안된다며 남편에게 자신의 뜻과 같기를 요구했다. 남편은 불편한 미소를 지으며 그래도 생신인데 밖에서 먹는 게 좋죠, 하며 제 의견을 말했다. 그래도 아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껄껄 웃었다. 저 웃음은 자신의 생각이 옳고 너희는 다 틀렸다고 생각할 때 나오는 비웃음이었다.


난 상을 대충 치우고 설거지는 나중에 하자는 엄마 말에 케이크를 꺼내와 거실에 앉았다.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소원을 빌고 초를 불었다. 엄마에게 케이크 칼을 쥐여줬다. 남편은 케이크 위에 올라간 과일 하나를 집어 엄마 입 앞으로 내밀었다. 나에겐 익숙한 일이지만, 엄마에겐 생소했는지 흠칫하며 먼저 먹으라고 손을 내저었다. 남편이 재차 내밀자 오호호, 웃으며 받아먹었다. 맛있는 건 항상 아빠와 아들이 먼저였던 엄마였다.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사셨고 사위의 다정함이 어색하지만 좋은듯했다.

남편은 나에게도 당연하게 케이크를 떠 먹여줬고 나는 생글 웃으며 고마워 남편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우린 서로를 존중하며 아꼈다. 처가에선 남편이 나를 챙겨주고 시가에선 내가 남편을 챙겼다. 그 모습이 불편한 건 비단 아빠뿐이었다.


"그러면 안돼. 길 잘못 들이는 거야."

"제가 좋아서 하는 건데요. 뭐."


더 이상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오래 머물러줬으면 하는 엄마에게 미안하지만, 있으면 있을수록 스트레스가 밀려오고 화가 올라왔다. 괜히 아빠에게 남편이 물들 것 같았다. 난 서둘러 집에 갈 준비를 했다. 엄마는 남편을 위해 만든 반찬 몇 개를 챙기고 남편은 엄마에게 용돈을 건넸다. 남편과 내가 정한 약속이었다. 용돈은 서로의 부모님께 직접 드리자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물었다. 우리 집에서 어땠냐고. 남편은 말했다. 확실히 장인어른이 가부장적이시라 조금 불편했다고. 나는 말했다. 나는 우리 집에 오래 있으면 머리가 아프고 피곤해진다고. 그 말에 남편은 입을 다물었다. 본가에 다녀오면 항상 피곤해 쓰러지듯 잠드는 나를 알아서였다.


시가도 아버지가 가부장적이시긴 하다. 하지만, 어머니를 살뜰히 챙기신다. 맛있는 게 있으면 어머니에게 먼저 먹으라 권했고 어머니를 비난하는 말은 일절 하지 않는다. 대신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밥 먹는 내내 하셔서 어머니가 화를 내신다. 그래도 어머니가 사랑스러우신지 허허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신다.


다행히 남편은 아버님을 닮았다. 무뚝뚝하고 표현력은 없지만, 맛있는 게 있으면 먼저 먹여주고 언제 어디서나 나를 우선시했다. 여자로서 보호받는 느낌이 뭔지 남편을 통해 알았다.


그래서 더 엄마가 안쓰럽게 느껴진다. 평생을 여자로서 보호받아본 적 없는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그 삶 또한 엄마가 선택한 삶이라 내가 관여할 권한은 없다. 그저 자신도 소중하고 사랑받아야 마땅한 존재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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