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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얏 Oct 19. 2022

서울 나들이 1


머리가 지끈거렸던 탓인지,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눈을 조금 붙였으나 지끈거림이 잠에 못들게 강제로 붙들고 있어서 마지못해 아침을 맞이했다. 밝아지는 세상에 맞춰 머리가 맑아졌으면 싶었지만, 불면은 떠오르는 태양을 불안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해가 질 때까지 집에서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


 집에 있는 동안 내심 집 안에서 산책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물리적으로 산책할 만한 공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 상태가 좋지도 않았지만 엉뚱하게 마음을 가졌다. 집에 머무는 동안 글도 쓰고 책도 읽고 늘 그렇듯 지루함에 허덕이기도 했다. 해가 질 때가 돼서야 집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버스에 몸을 싣고 도착한 곳은 영등포. 이상하게도 어릴 적부터 영등포를 무서워했다.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기억을 아무리 헤집어도 붙들리는 게 없다. 아무런 연유도 없이 영등포가 무서운 건 왜일까. 영등포를 지나칠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었다. 그래서 나는 한강에 가길 저버리고 영등포로 오게 된 걸까? 충동에 이끌리다 보면 의미심장한 미지로 용기를 내기도 하니까 말이다. 


 영등포역 앞에서 하차한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 역 앞으로 갔다. 우중충했다. 날씨 탓은 아니었다. 우중충이라는 말이 이토록 절묘하게 어울리는 시내는 찾기 힘들겠다는 느낌이었다. 내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는 그 공포는 어쩌면 이 우중충을 견디지 못했던 어린 감수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역 앞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며 느낀 번잡함은 바삐 유동하는 사람들에게서만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은 건물들 자체가 이미 번잡하고, 지나가는 차량에 비해 좁은 도로도 무시할 바가 못됐다. 잠시, 자전거 거치대에 띄엄띄엄 앉아 있는 부랑자들을 보며 '저들처럼 앉아 있어 볼까' 싶었으나 마음과는 별개로 다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다 역 근처에 나 있는 좁은 골목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 어딘지 모르게 가짜 위협을 풍기는 이 골목은, 분명 어릴 적부터 누군가가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고 금지시켰던 골목의 풍기였다. 눈에 들어오는 아주 낡은 간판 '여인숙'. 생각을 멈추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좁은 골목은 촘촘한 미로처럼 판잣집들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주로 수레들이 좁은 골목에 거치되어 있었고, 담배를 피우는 부랑자들이 보였다. 길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알콜중독자도 있었다. 조금 더 들어가자 [노숙자와 판잣집 거주자를 위한 무료 봉사 센터]가 나왔다. 가까이 다가서자 어디선가 들어봤던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기울였다. 도로를 훑고 가는 차량들의 경적 소리와 타이어 마찰음, 이들이 뒤섞인 도시의 번잡한 소음은 불과 50m 남짓을 두고 우중충한 하늘에 반향되고 있었다. 이곳은 왜 바깥으로 나가지 못할까. 저 소음들은 왜 이곳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는 걸까. 경계가 그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경계를 처음 느껴 보는 건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환멸이 일렁였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골목과 골목은 서로 이어져 있었고, 사람들이 옹기종기 무리지어 있었다. 마주한 그들을, 사회는 나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노숙자, 장애인, 매춘부, 알콜중독자, 범죄자, 부랑자, 약자, 노인 등등. 그렇지만 이 사회가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을 작가들은 알려줬다. 그래서인지 그들을 바라볼 때 길들여진 사회적 감수성을 담지 않을 수 있었다.


 골목을 누비며 눈에 들어온 장면들이 인상들로 모여 하나의 전경을 그려냈다. 하지만 이 거대한 크기의 화폭을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했다. 나에게 들어온 인상들은 대체로 충격이었는데, 이 충격은 태어나 처음 겪는 듯한 통쾌함이 아니라 이전의 나에게 고하는 경고와도 같은 사이렌이었다. 망설임 없이 욕망을 내보이는 그들. 걸을수록 바닥에 널부러진 사람을 보게 되고, 주섬주섬 아무렇게나 몸에 걸친 사람을 보게 되고, 그들의 눈빛에 깊이 빠져도 본다. 그들은 '사람'이다. 


 그러다 골목이 끝나고 난데없이 도시가 출몰한다. 충격으로부터 헤어나오기도 전에 돌연히 나타난 건물, 그것은 타임스퀘어였다. 골목을 빠져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즐비한 공장과 매춘업소를 지나치자마자 나타나는 거대 자본. 도대체 뭐하자는 걸까. 나의 인식은 방금까지 그들에게 사로잡혀 있었으나, 이 시내는 나에게 너무나 많은 과정을 약탈해 갔다. 불과 5분도 채 안 되는 거리에서.


 평소라면 크게 신경쓰지 않을 모르는 사람들이, 거대한 자본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모습에서 견딜 수 없는 어긋남이 엄습했다. 차려 입은 사람들, 그들 속에서 부유하는 노숙자. 이 위화감을 버젓이 드러내는 시내가 영등포였다. 아무리 높게, 크게 건물을 짓더라도 우중충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걸까. 새로 깔린 보도블럭에는 아주 오래되어 찌든 먼지가 눌러 붙어 있는 듯 했고, 짙은 권태가 도사리고 있었다.


 발터 벤야민은 19세기 파리의 모습을 보며 산책자의 모습에 대해 묘사했다.


산책자의 모습 속에는 이미 탐정의 모습이 예시되어 있다. 산책자는 그의 행동 스타일을 사회적으로 정당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심한 모습이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보다 더 안성맞춤인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무심함의 이면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범죄자로부터 한시라도 눈을 뗄 수 없는 감시자의 긴장된 주의력이 숨어 있다. [13a, 2]

- 아케이드 프로젝트, 발터 벤야민


 이후 나는 영등포를 거쳐 신길, 신풍, 보라매를 돌아다녔다. 밤의 골목들을 정처없이 누비며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 고요를 찾아다녔다. 노인들이 사는 골목은 오싹하리만치 고요하다. 그 평온을 무서워하는 건 분주함에 절여 버린 도시 젊은이의 특징이다. 한국으로 이민 온 중국인 가족은 어딘지 모르게 귀로 쳐다보는 느낌을 받았다. 인상들이 모여 만든 괴괴함이 자꾸만 나를 몽상으로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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