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얏 Oct 19. 2022

서울 나들이 3


오늘은 일산에 왔다. 호수공원이 있고, 군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라페스타도 있고, 바둑판처럼 계획된 단지가 있는 일산. 일산은 서울에서 벗어나 '경기도'로 분류되어 있지만 서울 나들이에 벗어나는 느낌은 아니었다. 


 해가 질 무렵에서야 시작된 산책은 동행인 2명과 함께였다. 동행인 A는 나보다 형이지만 몹시 순박하다. 그리고 겁이 많다. 동행인 B는 나보다 동생이고, 정말 이상한 아이고, 무엇보다 천진난만하다. 그래서 내 기준으로 봤을 때 몇 안되는 천재 축에 끼는 사람이다. 내가 구분짓는 천재란, 본능적으로 세계를 '자기 세계'로 끌고와 버리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인데, 대개 이 사람들은 할 줄 아는 것들이 많다. 가령 동행인 B는 노래를 잘하고, 시도 쓰면서, 나와 아무렇지도 않게 철학 얘기를 한다.


 산책을 할 때는 당시의 내 상태가 어떻냐에 따라 시선과 용도가 달라진다. 온갖 번잡한 것들이 내 안을 그득하니 채우고 있으면 산책은 곧 가없는 거울이 된다. 아직 나와의 대화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바깥의 언어들이 들어오지 못하고 나의 언어들이 반사된다. 허나 어떤 사건으로 인해 억압과 분노가 쌓여 언어로 터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면 산책은 곧 흔들의자가 된다. 나는 계속해서 분노의 양 극단을 재빠르게 오고가며 삭히거나 되돌린다.


 오늘 나의 상태는 피로와 체념이었다. 그리고 산책은 연회가 되었다. 정발산역에서 나와 호수공원, 장항습지로 가로지르는 논과 밭의 촌길, 그리고 장항천을 따라간 자전거 도로. 체감상 4~6km는 걸었던 것 같다. 목표는 장항습지였으나, 장항습지로 가는 길에 이미 도착해 있는 기분이었다. 어딘가에 당도하려는 그 마음들이 사실은 이미 당도해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기분. 결국 도착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삥 둘러서 마침표를 찍은 곳은 백석역이었고, 그곳에서 버스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산책 도입부로 거친 호수공원에서 '금요연주회' 중년 듀엣의 희나리를 들었다. 이 곡은 공원의 어르신분들을 자리에 앉게 했다. 나무에 수직으로 비추는 조명은 오늘따라 은은해 보였다. 호수의 물고기는 정말 컸다. 잉어가 거대 메긴줄 알았다.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보내고 받으며 우리는 점차 인적이 드물어지는 본격 산책로에 들어서게 되었다. 장항습지를 제안한 건 나였다. 가본 적도 없는데, 그냥 궁금했다. 지도는 나에게 이정도면 걸어서도 가겠네!라고 넌지시 보여줬지만 지도는 지도일 뿐 다리의 감각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장황습지에 들어가는 방법은 어떻고, 지금은 또 어떤 모습인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장항습지를 보고 싶었던 게 아니라 걷는 구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해는 떨어졌고,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드물어지는 인적. 이 풍경이 곧 장황습지라는 이미지에 낀 여지를 의미했다. 


 호수공원을 벗어나자마자 보이는 건 수풀 우거진 시골 길과 간간이 나타나는 가로등이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내달리는 차량들. 방향만 잡고 무작정 걸어가는 것이었기에 일단 걷기 시작했다. 버려진 공장이 나왔고, 정말 거대한 버드나무가 나타났고 (밤이어서 음침해 보였으나, 공포스럽진 않았다) 풀벌레들이 부르짖는 시골의 소리가 점점 밝아졌다. 길도 무작정 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한번 가기 시작하면 10분은 족히 걸어야 다음 길이 나오기도 했다. 도로 낀 인도를 마다하고 촌길로 걷게 된 것은 동행인 B의 즉흥적인 제안 때문이었다. 모험을 하자며 인도 중간에 나있는 음침한 계단을 제안했고,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우리는 그 계단을 택했다. 굴다리가 나오고, 점점 시골 풍경에 취했다. 사람도 차도 없고, 띄엄띄엄 나타나는 주황색 가로등은 깜빡이지만 장난스럽고, 겁이 많은 동행인 A에게 시시콜콜 겁을 주기도 하면서 촌길을 걷기 시작했다. 굴다리에서 B가 노래를 불러줬다. 지킬 앤 하이드의 OST였는데, 나는 화답으로 사진을 찍어주었고 B는 무대를 즐겼다. 간헐적으로 지나가는 차량이 나타나면 그 전조등은 우리에게 곧 조명이었다. 나와 A는 호응을 하고 B는 매너를 보였다. 재즈 노래를 더 잘하는 B는 난데없이 걷고 있는 촌길에 어울린다며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촌길은 어찌보면 고요하다. 그러나 나보다 귀가 예민한 동행인들은 소리가 잠든 시간에 대해 말했다. 나는 그 시간을 고독이 나타난 시간이라고 생각했고, 4년 전을 떠올렸다. 깨어있을 때 꾸는 꿈이 있다면 그건 고독이 나타났을 때라고 여겼었다. 달콤한 꿈이었고, 아무래도 깨어나고 싶지 않은 그런 꿈. 별이 쏟아지길 해맑게 웃으며 얘기하던 B는 드문드문 표정이 사라지기도 했다.


 촌길을 벗어날 즈음, 신화와 진실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다. B는 사랑은 신화일까 진실일까에 의문을 품었고, 나는 또 다시 4년 전을 회상했다. 이번 산책은 자꾸만 나를 되감기를 해 환상과 사실이 희미해졌다. 환상과 사실에 대한 집요한 갈등에서 점차 변해 갔던 나는, 그 갈등이 이제는 상상과 진실에 대한 의문으로 바뀌었다는 걸 알았다. 상상과 진실 사이에서 저울질하지 않았던 것들이 있었던가. 나는 상상 속에서만 살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진실로만 살아낸 것도 아니었다. 그 사이. 그 간극. 그 괴리. 정체모를 공중에 내가 걸려 있다는 걸 느낀다. 생 전반에 걸쳐 집요하게 달라붙어 있는 이 거대한 물음을, 필시 평생을 붙들어도 해결나지 않을 것만 같은 이 물음을 나는 어떻게 포기할 수 있을까?


 오늘은 사진을 2장 찍었고, 노트에 글을 쓰지 않았다. 이상하게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평범하다거나, 일반적인 사람으로 위장하게 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거리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을 코스프레하는 기분. 이 조용한 변모의 미동을 감지하지 못하는 순간, 나는 더이상 비상도 추락도 할 수 없을 거라는 불안, 부유하는 것도 아닌 그저 고정고 말 것이라는 상태. 내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멈춰버린 상태. 돌연히 예감이 엄습했다. 




작가의 이전글 서울 나들이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