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어떤 걸 절제해 봤지? 절제라는 단어의 의미를 뚜렷하게 인지하며 살아간 적이 있을까. 갑작스레 머릿속에 든 생각이다. 글이 너무 쓰고 싶어서 마음이 마구 간지러웠다. 글쓰기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워낙 문학적 사고를 추구하는지라 가끔씩 나도 감당되지 않을 만큼 내 안에서 휘몰아치는 뜨거운 열정이 무서울 때가 있다. 그래서 때마다 나는 '절제'라는 단어로 마음을 누른다. 꾹.
오늘의 일기 제목은 '마음이 복작복작'이다. 하고 싶은 것도 좋아하는 것도 많은 나이지만 욕구에 비해 지구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을 꽤나 하는 편이다. 이러면 어쩌지, 저러면 어쩌지 하고 안절부절못한다. 흔할 말로 유리심장 같달까. 그냥 나는 욕심이 많은 것뿐인데도. 어쨌든 지금의 이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서 나는 마음을 글로 쓰며 생각했다. 욕심에 비해 뚜렷한 방향성은 없으니 머릿속이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걱정 대출'이라는 말처럼 나는 미래에 대한 걱정을 너무 미리 하는 편이다. 지금 마주하지도 않은 상황에 대해서 해결을 고민하고 있으니 현재 내가 마주한 상황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체력과 에너지, 여유는 나에게 없다. 그러니 그만 멈춰야 한다. 그래서 나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고 눈을 감아봤다. 눈앞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 같을 때 눈 감은 나를 상상하고 내 주변의 환경은 내가 좋아하는 장소를 떠올린다. 대게는 대자연 속에 있는 나이다. 한없이 펼쳐진 자연 속에 있다고 상상하면 사서 했던 걱정은 잊히고 만면에 은근한 미소가 퍼진다. 걱정을 멈추는 행위. 이 또한 절제라고 생각한다. 걱정이 많은 사람에게 그만 걱정하라는 말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머릿속 떠오르는 생각은 물리적인 힘을 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단 음식을 무척 좋아한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팔고 있는 국산 젤리는 다 섭렵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내 동생들도 소문난 젤리 덕후로서 우리는 젤리로 형제애를 발휘하는 편이다. 저녁때쯤 외부활동을 마치고 집으로 귀가할 때 종종 우리는 젤리를 사들고 집에 온다. 새로운 젤리를 발견하거나 우리가 선호하는 젤리가 있다면 사들고 내 방에 모인다. 맛, 식감, 향, 목 넘김, 먹고 난 후 잔여느낌 등 우리는 꽤나 분석적으로 젤리에 대해서 토론한다. 그러다가 우리의 모습이 자각될 때는 실소가 터진다. 만약 우리가 제과회사의 젤리 맛 평가 부서가 있다면 아마 우리는 수석인재일 것이라고 농담을 주고받는다. (그렇지만 꽤나 진지한 생각이기도 하다.) 우리의 젤리사랑은 사실 과자, 아이스크림, 초콜릿 등 단 음식 범주에 있는 모든 것을 아우른다. 하지만 이제는 한계다. 특히 나는 30살로 20대인 동생들과는 상황이 다르다고 본다. 건강을 위해 나는 단 음식을 절제하기로 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꾸 살이 쪄서 옛날 옷이 맞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어렸을 때는 단음식을 맘껏 먹어도 체중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과식을 하지 않아도 살이 찌고 몸이 부어오른다. 신체적 변화를 체감하고 나는 단음식을 절제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매일 사던 간식을 끊고, 가끔씩 단음식에 대한 욕구 게이지가 끝까지 차오를 때 하나씩 사서 먹는다. 처음에는 그냥 서있다가도 갑자기 달콤 새콤한 젤리가 생각나 입에 침이 고이고 입맛이 돌았다. 그때마다 나는 물을 마셨다.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다 보면 물배가 차서인지 입맛이 뚝 떨어진다. 그렇게 버티다 보니 습관처럼 먹던 젤리는 구매 빈도수가 점점 줄었다. 과거에는 하루에 하나씩 사 먹던 젤리가 지금은 한 달에 2-3번 정도 사 먹는다. 완전한 0%로 섭취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지금처럼 조금씩 줄여가고자 한다. 과거 몸무게도 되찾고 가늘고 긴 삶을 위해 단 음식을 절제한다.
슬픈 영화를 보면 매번 눈물을 흘리는 나는 감정형 인간이다. 남이 울면 따라 울고, 남이 웃으면 따라 웃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런 인간이 나였다. 나는 타고나길 감정형으로 태어난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나의 아버지가 그러하다. 갱년기임을 감안하더라도 아버지는 매번 드라마 속 슬픈 장면을 보면 울고 목에 걸어둔 수건에 눈물을 닦아버리는 감정적인 분이시다. 내가 어렸을 때는 이런 감정적인 면모를 자연스럽게 표출했었다. 모든 게 나다웠다. 떠오르는 감정과 눈물을 참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울고 있는 상황을 즐기고 그런 나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낀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가 사무치게 그립다. 나는 눈물을 절제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드라마를 보고 우는 일은 잘 없다. 나의 현실은 때때로 드라마보다 슬플 때가 있다. 영화보다 더한 현실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펑펑 울고 싶을 때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우는 건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나의 상황을 비관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마음 깊숙이 꿀꺽하고 삼켜내는 게 스스로 더 강하게 느껴질 때가 있으니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눈물을 참지 않는 어떠한 특정한 상황이 있다. 나의 연인과 함께할 때면 나는 눈물을 참지 않는다. 사소한 말, 상황, 장면에도 나는 쉽게 눈물을 보인다. 한 때는 차에서 대화를 하다가 어떤 이야기에 눈물이 터졌는데 일회용 티슈 100매를 나 혼자 다 써버렸다. 그만큼 그 앞에서는 나는 절제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에게 이러한 그의 존재가 있기에 나는 스스로 눈물을 참는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는 울음이 몸에 차오를 때 펑펑 울어버리는 것도 도움이 된다. 눈물을 흘릴 일은 많지만 나는 매번 절제하고 참아낸다. 그리고 나 혼자일 때 또는 나의 연인과 함께일 때 나는 사소한 것에도 눈물을 쏟아낸다. 그러하기에 나는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