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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우 Jun 28. 2024

답이 아니다.

1. 상자 안과 상자 밖 


우리는 자라나면서 많은 것을 학습한다. 말하고 행동하는 법을 시작으로 읽고 쓰는 법을 익힌 후에는 각종 지식을 흡수한다. 이렇게 학습해 온 우리의 생각과 행동, 지식들에는 암묵적 규범들과 편견들까지 섞여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에서 학습해 온 것 이상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못한다.


1400년대 스코틀랜드의 괴담 같은 실화 소니 빈 일가 이야기에는 인간의 이런 한계가 잘 드러난다. 소니 빈과 그 아내는 평범한 집이 아닌, 해변가 동굴 안에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았다. 태어난 아이들은 근친상간을 반복해 수십 명의 남녀가 섞인 작은 사회가 되었다. 이 소니 빈 일가는 지나다니는 행인이나 여행자를 살해해 식인을 하며 먹고살았다. 그들의 동굴 안은 절단되어 가공한 인간의 신체 부위들로 정육점을 연상케 했다. 훗날 이 일당은 모두 체포되었다. 최초의 소니 빈 부부를 제외하면 모두 동굴 안에서 태어나 자란 이들로 기초적인 교육도 받지 못하고 원시적인 언어만 구사했다고 한다. 이들이 할 줄 아는 것은 인간을 사냥하는 것과 시체를 절단해 해체하고 요리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들이 동굴 안에만 갇혀 살았던 것은 아니다. 인간을 사냥하기 위해 밖으로 돌아다니며 때로는 사냥한 인간들의 소지품 중 신원을 특정하지 않는 것들을 가지고 마을에 물물교환을 하러 가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들은 자신들의 사회가 주입한 생활방식에 갇혀 '살인과 식인을 해서는 안 된다.'는 바깥 사회의 너무나 당연한 도덕을 알지 못했다.


https://youtu.be/uRY41kF_0Oc

현대판 유사 사례. 1900년대 초부터 100여년 동안 4촌간 근친혼으로 대를 이어온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오드에 사는 휘태커 가족. 각종 유전병과 장애에 앓고 있다. 이들은 장애의 원인이 근친혼인 것도 알지 못했고, 부모나 다른 가족 구성원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유튜브에 공개된 휘태커 가족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영상별로 조회 수가 수백만, 수천만 회에 달한다. 가족은 공개된 이후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이 때문에 경찰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진실인지 괴담인지 의견이 갈리나 이 이야기는 많은 콘텐츠의 소재가 되었고 지금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를 먹여 살리는 관광상품으로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진실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뒷이야기를 계속해 보자면, 이들 소니 빈 일당은 어린애고 노인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처형당했는데 모두 죽는 순간까지 전혀 뉘우침의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들에게 인간은 사냥감이었고, 우리가 다른 동물의 살코기를 먹는데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듯, 이들 역시 인간을 죽여 먹는데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가족 외의 인간은 모두 사냥감이고 식량'이라고 어린 시절부터 배워오고, 그렇게 행동하는 어른들을 지켜보고, 자라나서는 자신도 그렇게 행동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도 어떤 면에서는 이들 소니 빈 일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린 시절 어른들이 가르치고, 학교에서 배운 방식대로 행동하고 생각하며,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이 진실이라 믿으며 그 한계를 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미디어가 발달해 세상 모든 정보와 지식을 누구나 접할 수 있게 되었으나, 이제는 알고리즘이 우리의 생각과 취향의 경계를 정확히 파악해 우리가 한계를 깨지 않아도 될 범위의 '거슬리지 않는' 콘텐츠만을 노출한다. 


우리의 도덕, 지식, 교양, 생활습관, 식습관, 인간관계, 신념···.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둘러싼 안전한 세계(Comfort zone)이자, 우리가 갇혀 있는 '알'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범위 너머에 전혀 새로운 것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놀랍고 위대한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항상 알아야 한다. 


29세에 평생 살아온 왕국과 부귀영화를 뒤로 한 채,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간 한 왕자처럼, 때로는 익숙한 것이 너무 달콤할지라도 과감히 깨고 나아가야 한다. 그 왕자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다. 왕자에게 영감을 받은 독일 작가의 어느 소설 한 소절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中 


로맨스 드라마를 포함하여 너무나 많은 콘텐츠에 우후죽순 인용되어 이제는 거의 식상할 지경이라 해도, 이 문장을 가슴에 새길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의 중요한 시점에서 콜럼버스의 함정에 빠질 우려가 있다.


출처-<Peter Johann Nepomuk Geiger (1805-1880)/게티 이미지>


2. 상자 안의 콜럼버스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한 것은 콜럼버스였으나, 그는 그때까지 알려져 있던 지리학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굳게 믿은 탓에, 신대륙을 보고도 그것이 지도에 없는 새로운 대륙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저 동인도 제도의 한 섬이라고 생각했다. 그 착각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카리브해 연안을 서인도 제도(West Indies)라 부른다. 그렇게 자신이 아는 지식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 콜럼버스는 결국 자신이 첫발을 디딘 신대륙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아메리카'라는 이름은 콜럼버스 이후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항해에 몇 차례 참여했었던 이탈리아 선원 '아메리고 베스푸치'에서 따왔다. 그는 자신이 탐험한 그 대륙이 동인도 제도의 섬이 아니라, 인류가 지금껏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대륙이라는 주장을 담아 문서를 출간했고, 덕분에 21세기 가장 강력한 나라는 이름 없는 한 이탈리아인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렇듯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을 완전히 깨고, 때로는 '내가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구나'라고 무지를 인정할 수 있어야 우리는 새로운 성공의 영역을 개척할 수 있다. 


그런데 스스로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을 둘러싼 알을 깨고 나오는 걸 힘들어한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닐 수도 있다.'라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영상이 난무하는 유튜브 콘텐츠가 아닌, 독서라는 지적 행위가 전제되는 칼럼을 택해 읽고 계신 여러분은 지적 욕구가 뛰어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지적 욕구가 높은 사람들이 주의할 점을 좀 더 자세히 풀어보고자 한다.



지적 능력을 타고난 것은 언뜻 축복처럼 보인다. 지적 능력을 타고나면 어릴 때부터 '똑똑하다'는 칭찬을 받으며 어른들의 주목과 칭찬을 받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은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고, 특별한 우등생으로 대접받으며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기른다. 이 과정에서 똑똑한 이들은 '승리의 경험'을 쌓아나가며 성공궤도에 진입한다. 꼭 이렇게 공부를 잘했던 경우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공부에 흥미가 없었지만 남들보다 이해력이 높아서 문제의 핵심을 빨리 포착하는 등 지적 능력이 뛰어난 이들 또한 작든 크든 가치를 인정받고 성과를 냈던 경험이 많다. 이들의 세계는 인정받고 승리해 본 경험의 데이터가, 멸시받고 패배해 본 경험의 데이터보다 많기 때문에, '나는 원래 승리하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러면 잠재의식에도 '승리'가 입력되어 자연스레 인생도 성공의 길로 나아간다. '나는 원래 승리하는 사람'이기에 실패 앞에서도 당당하게 다시 새롭게 도전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당당한 자신감이 도를 넘어 오만이 되는 순간, 오만은 이 똑똑한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성공으로 가던 인생의 궤도를 뒤틀어 버린다. 다시 콜럼버스 이야기를 봐 보자. 그도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었다. 바다에서 항해를 계속하면 세상의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을 거라 믿었던 그 시대 일반적인 사람들과 달리, 그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이해하는 지식인이었다. 또한 직접 스페인 여왕을 설득해 항해에 필요한 지원을 받아낼 만큼의 담대한 수완도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지식을 너무 믿은 나머지 기존에 '있다'고 알려진 대륙 외에 새로운 대륙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해 자신의 공로를 다른 이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그러니 다 안다고 생각되어도 언제나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마음을 열자. 내가 옳다고 믿는 모든 것,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모든 지식은 세상의 극히 일부를 특정한 관점에서 해석한 것들일 뿐이라는 것을 알자.


3. 우상을 깨자 


성장하는 삶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은 우리 내면의 신대륙을 발견하는 일과 같다. 마침내 성공이라는 신대륙에 무사히 닿는다 해도 그 새로운 땅이 오직 당신만을 위해 준비된 성공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 때로는 당신이 믿고 있던 모든 것을 깨고, 옳다고 믿어왔던 모든 지식을 버리고, 믿고 의지하는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도 당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갈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거친 바다를 항해해 낯선 땅에 발 디딜 수 있으며, 그 땅이 바로 신대륙이라는 것도 알아볼 수 있다. 당신은 성공을 향해 오는 길에 기존에 있던 지도를 참고했겠지만, 막상 성공에 이르러서는 그 지도를 던져 버려야 더 큰 성장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임제선사는 이런 말을 했다.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 임제(臨濟, ?~867) <임제어록> 中


조사 : 후세 사람의 귀의와 존경을 받을 만한 승려이거나 1종 1파를 세운 승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나한 : 불교의 수행을 완성하고, 사람들로부터 공양과 존경을 받을 값어치가 있는 성자(출처 : 미술대사전[인명편]). 



임제선사가 죽이라고 한 것은 바로 외부의 권위에 대한 복종이다. 사람들은 기존의 권위 앞에 몸을 낮춘다. 기존의 권위를 떠받들면서도 그것이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복종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많은 경우 기존의 권위에 대한 복종은 우리에게 또 다른 권위를 부여한다. 이를테면 선대의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쌓아둔 지식을 모조리 익힌 박식한 지식인에게 권위가 부여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된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며 세상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할 수 있지만, 사실은 기존의 지식에 철저히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가 했던 말에 권위를 부여하고 복종하는 사람은 부처가 될 수 없다. 콜럼버스 역시 그랬다. 그가 당시의 지도에 그려져 있는 세계만이 진짜 세계이고 자신은 세계를 모두 안다고 생각했다. 기존의 지식에 복종해 자신이 새로운 발견을 했다는 것조차 몰랐다. 우리도 기존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부여된 가짜 권위에 취해 그런 실수를 범할 수 있다. 


권위든 경험이든 관념이든 나를 속박하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과감하게 쳐내버려야 한다. 

그렇게 스스로 모험을 시작한 자만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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