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영 <나의 해방일지>
※ 이 글은 <나의 해방일지>를 비롯해 박해영 작가의 이전 작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1. 해방과 추앙에 사로잡힌 마음(들)
<나의 해방일지>를 보고 느낀 감흥과 인상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풀어내고 정리하려고 했지만, 오랜기간 응어리 진 듯 딱딱하게 굳어져 쉽게 풀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어떤 이미지가, 어떤 생각이, 어떤 통찰이 내 머릿속을 부유하고 있었지만 모종의 이유로 서로 연결 짓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드라마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게 된 이 시점에서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해방"과 "추앙". 종이 위에 딱 붙어서 인쇄된 -혹은 화면 위에 띄워진- 글자 외에는 딱히 말로 내뱉을 일 없는 낱말들이 내 생각을 둘러싸고 거대한 울타리를 만들었다.
어떤 작품의 제목은 단어가 의미하는 바, 가리키는 바가 너무 선명한 나머지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을 얇고 좁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그렇다. 일상에서 접하기 어렵고, 낯설고, 다른 맥락으로 옮겨온 "해방"이라는 말은 극 중에서도, 극 바깥의 현실에서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의미일지 (계속) 상상하게 한다. 어떤 의도로, 어떤 목적으로 생소한 말을 골라서 사용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머리를 가동한다. 이 과정에서 작은 말에 사로잡혀 작품을 바라보는 단일한 관점이 생긴다. "해방"이라는 말에 갇혀서 생각이 구속되는 아이러니. 이건 "추앙"도 마찬가지이다. 2부 마지막, 갑작스럽게 내뱉어지는 미정(김지원)의 뜬끔없는 대사에 구씨(손석구)도 시청자도 단어의 뜻과 인물의 생각을 파악하는 데에 힘을 쏟는다. "추앙"이라는 단어를 재료로 삼아 미정과 구씨의 관계를 (재)정의하게 되고, 인물의 행동에 "추앙"이라는 틀을 씌워서 바라본다.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기에 더욱 신중하게 단어의 의미를 고심하고, 의미의 맥락을 살펴본다.
드라마는 말의 세계이다. 인물들은 대사를 통해 극을 진행하고, 행동하고, 갈등을 유발하고, 사건을 해결한다.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연출자보다 작가를 더욱 중요하게 보는 관점 또한 이런 맥락에서 비롯된다. 때문에, 작가의 언어 감각과 돌출점은 시청자가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박해영 작가의 대사는 유사하거나 반복되는 패턴을 활용하기도 하고 때론 -앞서 얘기한 경우처럼- 생소한 낱말을 활용하여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한다. 대사 중심으로 드라마의 서사를 이해하는 과정에 익숙한 나머지, 작가의 언어 감각에 홀려서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에 실패하게 된다.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염가네 삼 남매가 결국에는 "해방"하게 될 것인지, 미정이와 구씨가 서로에게 열렬히 "추앙"하는지를 중점적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사건 해결 과정을 가져와서 "해방"이라는 자석에 모조리 끌어와 붙인다. 그러니까, 드라마를 제대로 보려면 "해방"과 "추앙"이라는 말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2. 작가의 작가성
그렇다면,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말(대사)에 끌려다니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요소를 살펴보고, 파고들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 대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 대사와 아무런 관계를 맺고 있지 않지만 극에 효과적으로 기능하면서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 이미지. 우리는 드라마가 영상 매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인식해야 한다. 대본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영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독립된 말과 이미지가 평행하게 가면서 극에 봉사할 때 이야기는 더욱 두터워진다. 때문에, 박해영 작가가 다루는 이미지(들)을 탐구하면서 박해영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파헤쳐보고자 한다. 이 과정은 작가의 이전 작을 같이 검토하면서 반복되는 지점을 엮어서 박해영 작가의 세계를 더욱 탄탄하고 깊이 이해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그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작가(Writer)의 작가(Author)성이다. 드라마는 영화와 다르게 작가를 작품 세계를 주도하는 지배적인 위치로 놓는다. 때문에 드라마의 흥행과 투자, 캐스팅에도 작가의 이름이 손쉽게 오르내리고, 작품의 완성도를 작가의 수준과 같은 선상에 놓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과물이 영상이라는 점에서 작가는 정해진 한계선까지만 움직일 수 있다. 글이 시각화될 때 작가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그리 넓지 않다. 작가는 글을 다 쓴 순간 자신의 몫을 다하고 물러나야만 하는 존재이다. 때문에, 작가를 중심에 놓고 작품을 이해할 때, 특히나 작가가 개입하기 힘든 영역까지 끌어와서 작가의 속성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오독하거나 왜곡하거나 착각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때문에, 작가의 세계를 더 알고 싶다는 목표 하에 그 지점을 분별력 있게 구분하고 억지스러운 부분을 걷어낸 채 신중하게 봐야 한다. 드라마라는 매체가 영화보다 더 종합적이고 복합적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미지를 포착해야 한다.
또한, 박해영 작가는 다작 작가가 아니라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1998년 <LA 아리랑>을 시작으로 작가 경력을 쌓아왔지만, 단독 집필로 작품을 남긴 것은 2016년 <또 오해영>부터이다. (그 이전에 메인 작가로 집필한 <청담동 살아요>도 있지만, 이는 일일연속극으로 170부작 되는 시리즈물이고 공동 집필물이기 때문에 16부작인 미니 시리즈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점에서 곤란한 작품이다.) 그러니까, <또 오해영>부터 <나의 해방일지>까지 박해영 작가는 24년 작가 경력에서 7년 정도 단독 집필한 것이다. 단 세 편의 드라마, 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의 작품을 엮어서 하나의 작가 철학 혹은 세계관으로 이해하는 일은 우스꽝스럽고, 억지스러운 일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박해영 작가가 가진 드문 감각이 인상적이고 작품마다 반복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한 마디 덧붙이는 일이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3. 바람이 불어올 때
14부에서 미정이 자신이 속한 디자인 팀의 팀장인 최준호(이호영)와 불륜 관계라고 회사에 소문났을 때, 직장 동료이자 가까운 사이인 한수진(공예지)은 어림도 없는 소리라며 무시하라고 일갈한다. 그러면서 누구랑 바람피우는지 아냐고 물어본다. 그때 미정이 고개를 끄덕이고, 수진이 누구냐고 반문하자 미정은 수진을 빤히 바라본다. 최준호와 바람피우는 것은 수진이기 때문이다. 미정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는 계기가 되는 이 장면은 비교적 짧게(단 두 씬으로), 많은 부분이 생략된 채로 넘어간다. (그 뒤에 구씨네 집 평상에 멍투성이인 채로 앉아있는 미정의 모습을 바로 붙여서 그 사이의 일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14부에 이르기까지 매일매일, 고통스럽게 출퇴근했던 회사는 그렇게 갑자기, 어떻게 보면 무책임하게 극 중 배경에서 제외된다. 서사적 방점이 찍혀야 할 자리를 비우고 시청자의 상상으로 메꾼다.
서사의 비중으로 보면 사소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아주 잠깐 다루고, 이후에 이렇다 할 영향을 끼치지 못하니까. 그러나 서사의 경중으로 따지면 중요한 장면에 속한다. 미정이에게 팀장은 극복해야 하는 존재이고, 대항해야 하는 존재였고, 회사와 동료들은 미정이의 기를 죽이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서사적 해결 목록이 단번에 처리되었을 때, 일종의 당혹감이 느껴진다. 드라마는 이런 압축적 전개에서 비중은 그대로 둔 채 방점을 찍는 방법으로 이미지에 힘을 준다. 해당 장면을 보면 미정과 수진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서 기다리고 있다. 사방이 벽으로 막힌 실내 공간에서 수진이 누구인지 아냐고 물었을 때, 미정의 얼굴에 바람이 분다. 그 장소에는 바람이 불어올 이유가 없다. 하지만, 바람은 불었다.
어디서 바람이 불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 바람이 부는지를 묻는 것이 정확한 질문에 가깝다. 드라마 내내 미정이에게 부는 바람은 반복되기 때문이다. 3부 마지막 장면에서 미정이가 구씨에게 인사를 하고 지내자며 어렵게 인사를 건네고 구씨가 그 말에 버스 타라는 말로 화답했을 때 미정이가 탄 버스에서, 5부에서 미정과 구씨가 처음으로 밥을 같이 먹을 때 미정이 앉은자리에서, 6부 구씨의 집에서 처음으로 구씨의 사정을 듣고 이해하고 위로할 때 미정의 자리에서, 14부 마지막에 구씨와 미정이 재회할 때, 16부에서 찬혁 선배에게 인사를 건네고 아무 일 없이 돌아설 때,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 때는 미정이가 이야기의 구성점이 되는 행동을 할 때이다. 동시에 미정이가 가장 단단한 상태일 때이다. 앞서 언급한 다른 장면들은 장면의 실제 공간이 실외이거나 바람이 들어올 수 있는 창문이 있는 경우이다. 그러나 14부에서 미정이 수진을 쳐다보는 장면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앞서 언급한 장면들에서 바람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지점과 공통점으로 엮여 의미를 만들어낸다.) 불가능한 상황과 벌어진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메꿀 수 있는 것은 인물의 상태이다. 미정 내면의 외면화. 우리는 이 지점을 붙잡고 이미지를 확장시킬 수 있다.
10부의 구씨는 미정에게 도시로 가서 본능을 죽여야 된다고 말한다. 반대로 얘기하면 도시가 아닌 곳에서 미정은 본능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간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미정은 구씨에게 "추앙"이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던지고, 들개에게 가방을 던지고 패고, 개구리 죽는 얘기를 툭툭한다. 15부 초반, 구씨는 미정과 공원을 걸으면서 우리는 이런 들이 어울린다고 말한다. 여기서 "들"은 앞서 10부에서 구씨 자신이 말한 "도시"에 반대되는 개념일 것이다.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너는"이 아니라, "우리는"이라는 점이다. 구씨 자신도 들에 있으면 본능이 살아나는 존재가 된다.
4. 박해영 작가가 산포를 무대로 한 이유
이 지점까지 왔을 때, 잊어버린 글의 제목을 다시 한번 꺼낼 필요가 있다. 박해영 작가는 드라마의 주요한 무대로 '산포'라는 가상의 경기도 지역을 만들어낸다. 드라마 홍보도 경기도를 강조했고, 드라마 초반에도 이런 지점을 콕 집어서 대사로 표현하기도 한다. 노른자와 흰자. 서울과 경기도의 대비.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울이 어떤 지역인가를 별개로 해도, 경기도는 그 지역의 넓이 때문에 통일된 이미지로 시청자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서울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런데도 드라마는 산포를 경기도라기보다는 아직 문명이 도착하지 않은 시골(혹은 자연)처럼 그려낸다. 경기도의 끝자락에 경기도처럼 안 보이는 공간을 설정하고 매 회마다 서울과 경기도를 왕복하는 동선을 만들어낸다. 이 선택의 이유는 무엇인가.
드라마의 극이 집중되려면 가능한 한 공간 안에 극적 장소를 밀집시키고 갈등을 주조하는 것이 일반적인 작법이다. 시청자는 그렇게 오밀조밀하게 모인 장소 안에서 다른 곳으로 시선이 튀지 않고 극을 감상한다. 그러나 <나의 해방일지>는 이런 지점에서 약간은 빗겨 나있다. 염가네 삼 남매가 다니는 회사와 캐릭터들 간의 서사는 붙는 듯 붙지 않는 점근선처럼 보인다. 미정이 동아리를 만들라는 회사의 압박에 만들어내는 '해방클럽'과 미정의 서사는 완전히 밀착되지 않고 헐렁하게 붙어있다. 혹은 성긴 바느질로 겨우 붙여놓은 옷감처럼 붕떠있다. 기정의 리서치 회사도, 창희의 편의점 본사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이런 설정과 배치는 세련되지 못한 서툰 작법의 결과라기보다는 인물의 내적 상황을 표현하는 핵심 장치의 일부로 이해해야 한다.
박해영 작가의 장소 감각은 특이하면서도 일관된 면이 있다. 도시와 건물을 사람을 긴장시키는 공간으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또 오해영>에서 오해영(서현진)이 자신의 아픔을 숨긴 채 미친년인 것처럼 연기하는 것도,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이선균)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메마른 존재처럼 일을 하는 것도, <청담동 살아요>에서 김혜자(김혜자)가 기를 쓰고 거짓말을 하고, 가진 척을 하는 것도 모두 그들이 도시에 살고, 건물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건축물은 인간을 압도하고, 수직과 수평선으로 쪼개진 폐쇄적인 공간에서 인물들은 늘 날이 서있고, 서로 경계하고, 감시한다. 도시는 그런 건축물이 즐비한 곳이다.
도시에서, 건물 안에서는 공기의 흐름을 크게 느낄 일이 없다. 사방이 벽으로 막혀서 공기의 흐름을 차단하고, 그 안에 이런저런 물건과 시설로 가득 채워서 공간을 구성하기 때문에 환기를 시킬 때도 인위적인 장치를 통해 공기를 순환시킨다. 인위성, 인공성으로 가득한 공간 안에서 자연은 배제되고, 멀어지고, 까마득한 존재가 된다.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까먹게 되고 시공간적인 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하늘이 찢어질 듯하게 천둥 번개가 칠 때야 겨우 우리는 비로소 자연으로서의 바깥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런 폐쇄성의 극단을 달리는 공간이 바로 구씨의 공간이다. 구씨의 당혹스러울 만큼의 과거와 직업, 그가 활동한 세계가 수사학적, 공간학적으로 지하 세계라는 점에서 박해영 작가는 일관된 맥락을 이어나간다. 산포를 떠난 그가 늘 위태로워 보이고, 날이 서있고, 알코올 중독에 시달려 죽음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것은 그가 격리된 공간, 사방이 꽉 막힌 공간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런 공간에서 살 수 없다. 도망도 칠 수 없다.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햇빛, 달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공간. 그런 공간에서 사는 일은 죽는 날을 받아놓고 기다리는 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박해영 작가는 <나의 해방일지>에서 서울과 경기도를 왕복하는 동선을 설계하면서 긴장과 이완의 장소를 대비시키기로 작정한 것 같다. 그러니까 산포는 사람을 이완시키는 공간이다. 산포에서 본능이 살아난다는 것은 도시에서 죽이고 있던 본능을 산포라는 장소가 다시 풀어준다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 작인 <나의 아저씨>에서는 후계동이 그런 역할을 한다. 후계동 또한 가상의 공간으로 높은 건축물이 적고, 골목이 가득한 약간은 낙후된 공간으로 그려진다. 그런 공간으로 퇴근하면서 이지안(이지은)과 박동훈은 바람을 맞으면서 걷고 그 과정을 통해 긴장을 푸는 작업을 한다. <나의 아저씨>에서 유달리 걷는 장면이 많다고 느껴지는 것은 인물들이 건물을 벗어나 거리에서 자연을 느끼면서 본능을 깨울 때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또 오해영>에서 해영과 도경이 거리를 걸으면서 이야기하는 장면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나의 아저씨>에서도 <또 오해영>에서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자연의 이미지를 끌어와서 이야기를 진행하지는 않았다. 본격적으로 장소의 이원화, 그리고 교차 구성을 통해 이야기를 진행시키면서 박해영 작가는 한 발 더 나아간다.
5. 불편한 집(건물)
이런 맥락에서 박해영 작가의 드라마에서 집은 (그 자체로) 편한 공간이 아니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미정이 구씨네 집에 처음 가게 되는 계기는 대출금 반환 고지서가 집에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집 안에서도 식구끼리 경계하고 감시하기 때문에 늘 긴장해야 한다. 창희는 구씨의 차를 빌렸다는 것과 회사를 그만뒀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되고, 기정은 집에 있으면 일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늘 도망간다. 엄마인 혜숙(이경성)에게 집은 직장이고, 염제호(천호진)에게 집은 일해야 하는 이유이다. 구씨의 위치가 발각된 이후, 구씨네 집도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긴장해야 하는 공간이 된다.
이는 이전 작에서도 그랬다. <또 오해영>에서 해영에게 집은 파혼 사실을 상기시키는 공간이고, 박도경(에릭)에게 집은 잃어버린 아버지를 상기시키는 공간이다. <나의 아저씨>에서 이지안에게 집은 광일(장기용)이 오지 못하게 하고 할머니를 챙겨야 하는 공간이고, 박동훈에게는 바람피운 아내 윤희(이지아)가 있는 공간이다. 박해영 작가의 세계 속 인물들에게 집은 무언가를 계속 신경 써야 하는 곳이고,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하는 공간이다. 이는 도시 속에 집이 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집 그 자체로 건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인공적이고 협소한 공간 안에서 인간은 날이 설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산포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완의 공간이 아니다. 어쩌면 박해영 작가는 이 지점을 돌파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장소성을 강조해서 보여주는 것 같다. 도시와 자연, 그리고 가장 편안할 거라고 생각(착각)하는 집. 서울과 경기도를 매회 왕복하는 동선은 대비이기도 하지만, 인물들에게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계속 긴장 상태일 때보다 긴장과 이완을 수시로 반복할 때 오는 피로감이 더하는 사실을 드라마의 서사 과정을 통해 설득하고 있다. 염가네 삼 남매가 지지부진한 퇴근길을 거쳐 집에 왔을 때 안도하지 않고 더욱 지쳐 보이는 것은 실제로 장소성이 변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동일한 조건에 놓인 인물들은 자신이 쉴 자리를 찾지 못한다. 산포라는 자연이 펼쳐진 공간에서도 집은 편안한 공간이 아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건물을 벗어나 평생 살 수도 없다. 물리적 한계와 심리적 제약으로 둘러싸인 인물들. 이것을 해결하는 것이 드라마의 진정한 목적이다.
6. 힘내는 게 아니라 힘 빼는 것
여기서 다시 14부의 미정에게 불었던 바람에 대해서 얘기해야 한다. 멀리 돌아왔지만, 이제는 이상한 장면의 성립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바람이 불 수 없는 공간에서 바람이 불었을 때, 이는 실제 바람이 아니라 영상 매체를 통해 시각화된 바람이다. 미정은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서도 이제는 바람을 맞을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난 것이다. 본인이 원할 때 언제든지 긴장을 풀고 상대할 수 있을 만큼의 마음가짐이 된 것이다. 그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수진에게 '니가 바람피운 걸 알고 있어'라고 눈빛으로 얘기한 다음 씬, 수진이 미정에게 역정 낼 때 미정도 화를 낸다. 그때 미정은 엄마의 장례식을 언급한다. 장례식장에서도 연애질이었던 두 사람을 언급하면서 화를 낸다. 그러니까, 서사적으로 미정의 화는 엄마의 장례식장을 기점으로 인내심의 한계점을 돌파한 것이다. 중요하면서도 의문스러운 장면인 게 엄마의 죽음 이전까지 엄마의 캐릭터는 극에서 사실 공기처럼 떠도는 존재였다. 그러나 엄마의 죽음 이후 발생하는 모든 이야기는 이전의 이야기를 비웃듯이 곡예비행을 하면서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 거의 다른 드라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있을 때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없어지니 드러나는 그 빈자리를 통해 존재감을 역설한다.
주의할 점은 엄마의 죽음이 미정의 각성 계기라는 서사적 인과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미정은 그전부터 이미 변화의 조짐을 보여왔다. 구씨와의 관계를 통해 행동의 변화를 가져왔고 그건 구씨가 만들어낸 변화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변화이기 때문에 구씨의 존재와는 상관없이 작동하는 것이다. 그동안 아무 일 없이 있다가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화를 낸다는 것이 아니다. 엄마의 죽음으로 인한 가족의 변화는 그 자체로 충격적이다. 한 존재가 빠지면서 생기는 효과와 그 여파를 극 중 인물과 시청자 모두 겪는다. 박해영 작가는 어떤 요소가 더해졌을 때보다 어떤 요소가 빠졌을 때 만들어지는 거대한 힘을 아는 작가이다.
이건 일종의 깨달음의 연장선이다. 사랑은 심장이 뛸 때가 아니라 심장이 가만히 있을 때 있는 거라는, 쉼은 힘을 내고 기를 써서 얻는 게 아니라 힘을 빼고 내려놓을 때 얻는 거라는, 관계는 서로에게 어떤 것을 바랄 때 성립되는 게 아니라 어떤 조건도 바라지 않을 때 성립된다는, 깨달음이다. 무언가 채우고, 덧대고, 힘쓰고, 조건 다는 일이 지치게 만드는 일이라면 이런 것을 하지 않고 하나씩 걷어낼 때, 힘을 뺄 때, 가만히 있을 때, 요구하지 않을 때 진정한 편안함, 자연스러운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박해영 작가의 작법의 미학이 있다면 뺄셈의 미학이다. 박해영 작가가 시시때때로 작품을 통해 도시와 건물을 긴장의 공간으로 그리는 것은 그곳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어떤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기를 쓰고 채우고, 올리고, 공을 들여서 만든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요소를 걷어낼 때 진정으로 자연스러운 상태, 편안한 상태에 이른다는 점에서 자연을 장소로서 대비시킨다.
도시와 자연의 대비는 일종의 비유이다. 채운 공간과 덜어낸 공간. 타고난 것만 있는 공간으로서의 자연. 박해영 작가는 자연스러운 상태를 이상적인 상태로 놓고 이 지점을 위해 인물들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그려낸다. 그러나 이런 비유가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물리적 조건을 넘어서 표현으로서 작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14부의 해당 장면에서는 불가능한 바람을 불어 일으킴으로써 이런 비유를 성립시킨다. 즉, 장소성에서 벗어나 심리적으로 자연스러운 상태에 도달할 때, 우리는 단단해지고 편안해지고 이상적인 상태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해방일지>의 마지막 장면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미정은 마지막 장면에서 날고있다. 장소와 관계없이 미정은 자연스러운 상태에 머물러서 살 수 있다. 본능과 야성, 타고난 것만 남은 상태. 그저 존재하는 상태. 자연 그 자체인 상태. 때문에, 미정은 시청자들에게 느낄 게 사랑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