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습관적으로 유튜브 숏을 보곤 한다. 기분 전환으로 잠깐 보는 건데 어때? 하고 합리화를 시키곤 하지만, 한번 보기 시작하면 한두 영상만 보고 멈춰지지가 않는다. 짧아서 더 재미있기도 하고, 시간을 덜 빼앗기는 기분이 든다. 드라마나 예능 영상도 짧고 굵게 보여주니, 더욱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호기심이 생겨 제대로 된 영상을 찾아서 보면, 숏에서 보았던 재미가 똑같이 느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짧게 느껴진 시간들이 지나고 보면 훨씬 긴 시간을 잡아먹어버린다. 유튜브 숏만 그럴까. 생각해 보면 무수히 많다. 교묘하게 인간의 시간을 잡아먹는 유혹들이.
시간도둑인 회색신사가 시간의 꽃을 빼앗기에 이보다 더 좋은 시절이 있을까 싶다. 물론 시간도둑들(회색 신사들)은 미하엘 엔데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존재들이다. 최근에 <모모>를 다시 읽으니, 시간도둑들이 시간을 훔치는 방법들이 어쩜 이렇게 요즘 세상사를 잘 반영하고 있는지 놀라웠다.
시간도둑들은 시간의 꽃(작가는 '시간'을, 각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어떤 근원의 장소에서 피어난 꽃이 그 사람에게 스며들어 삶이 흘러갈 수 있게 하는 것으로 표현함)을 빼앗아 자신들의 냉기로 얼려 보관하면서, 시간이 필요하면 꽃을 바싹 말려 가루로 내어 시가를 만들어 피움으로써 생명을 연장한다. 때문에 회색신사들(시간도둑들)은 늘 한 손에는 시가가 담긴 납회색 서류가방을, 입에는 연기 나는 시가를 물고 다닌다. 이들은 주인을 잃어버린 죽은 시간으로 생명을 연장하기 때문에 온통 회색빛인데 시가를 빼앗기면 연기처럼 사라진다.
회색신사들이 시간을 훔치는 방법은 이렇다.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며 우울해하거나 욕심을 충족시키지 못해 괴로워하는 등 마음에 불만이 쌓이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 사람 앞에 나타나 시간저축은행을 소개하면서 시간을 저축해서 원하는 꿈을 이루라고 유혹한다. 이들의 유혹에 넘어가 시간을 저축하겠다고 계약하면, 회색신사는 사라지고 유혹에 넘어간 사람은 회색신사를 만난 기억을 잊어버리고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라고 생각하며 삶을 변화시킨다. 시간을 빼앗는 쓸모없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행동들을 멈추고 오직 목표 달성을 위해서만 시간을 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을 아껴 쓰면 아껴 쓸수록 시간은 더욱 부족해지고 여유가 없어진다. 시간을 아껴 씀으로써 돈이나 명성은 올라가지만, 삶의 여유나 행복, 기쁨은 점점 사라진다. 너무 바빠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조차 생각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모모의 친구인 음식점 주인 니노는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음식을 판매하기 위해 뷔페식으로 음식을 진열하고, 고른 음식을 계산한 손님들은 서서 먹을 수 있는 테이블에서 짧은 시간 동안 음식을 먹고 나간다. 손님들은 너무 바쁘기 때문에 이렇게 짧은 시간에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오히려 좋게 생각한다.
모모의 또 다른 친구인 미장이 니콜라는 빠르게 진행되는 건설현장에 투입되어 바쁘게 일한 덕분에 많은 돈을 번다. 하지만 건설 현장이 돈을 버는 데만 혈안이 되어 엉터리 건물들을 지어댔기 때문에, 니콜라는 미장이로서의 자부심을 잃어버리고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술을 마시는 것으로 삶을 탕진하고 있다.
모모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인 기기는 유명한 이야기꾼이 되어 방송에 출연하면서 화려한 삶을 살아가지만, 마음은 공허했고 너무 바빠서 모모와 이야기할 여유도 갖지 못한다.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아이들은 탁아소 같은 곳에 맡겨져 시간도둑들이 원하는 사고방식을 강요받으며 길러진다. 놀이도 주어지는 것만 하고, 모든 행동은 앞날에 유익한지, 아닌지에 따라 결정된다. 요즘 우리 아이들도 비슷하다. 맞벌이 부부가 많아지면서 부모가 아이를 돌볼 여유가 없어지자, 부모의 근무시간을 줄여서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늘리는 대신, 아이들을 학교에 잡아두는 시간을 늘려서 부모가 일을 많이 하는데 지장이 없게 정책을 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가장 최악은 입시제도다. 오죽하면 초등학교, 아니 유치원 때부터 입시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를 따져 교육을 할까.
어쩌면 시간도둑들은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시간의 꽃이 저절로 넘치게 들어와서 호의호식하며 지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인터넷, 스마트폰, sns, 숏동영상 등이 사람의 시간을 잡아먹어 시간도둑들에게 상납하고 있을 테니까. 성공에 대한 욕망을 조금만 건드려도 알아서 시간을 상납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sns와 유튜브 콘텐츠 제작에 뛰어들고 있는가. 돈이 되지 않는다면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콘텐츠를 제작하느라 혈안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또한 시간도둑들의 음모일지도^^
시간의 근원지 관리자인 호라 박사는 시간도둑들과의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모모에게 말한다.만일 시간도둑들의 음모가 성공한다면, 새로 만들어지는 시간에 시간도둑들의 유령 같은 시간이 섞이게 되고, 이 섞인 시간을 받는 이들은 죽을병에 걸리게 된다고. 박사는 그 병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처음에는 거의 눈치를 채지 못해. 허나 어느 날 갑자기 아무것도 하고 싶은 의욕이 없어지지.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낄 수 없지. 한 마디로 몹시 지루한 게야. 허나 이런 증상은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커지게 마련이란다. 하루하루, 한 주일 한 주일이 지나면서 점점 악화되는 게지. 그러면 그 사람은 차츰 기분이 언짢아지고, 가슴속이 텅 빈 것 같고, 스스로와 이 세상에 대해 불만을 느끼게 된단다. 그다음에는 그런 감정마저 서서히 사라져 결국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게 되지. 무관심해지고, 잿빛이 되는 게야. 온 세상이 낯설게 느껴지고,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 같아지는 게지. 이제 그 사람은 화도 내지 않고, 뜨겁게 열광하는 법도 없어. 기뻐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아. 웃음과 눈물을 잊는 게야. 그러면 그 사람은 차디차게 변해서,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사람도 사랑할 수 없게 된단다. 그 지경까지 이르면 그 병은 고칠 수가 없어. 회복할 길이 없는 게야. 그 사람은 공허한 잿빛 얼굴을 하고 바삐 돌아다니게 되지. 회색 신사와 똑같아진단다. 그래, 그들 중의 하나가 되지. 그 병의 이름은 '견딜 수 없는 지루함' 이란다.
<모모/ 미하엘 엔데/ 한미희 옮김/ 비룡소, 328~329페이지 중에서 >
박사의 이 설명은 어딘지 익숙한 느낌이 든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권태'가 떠오르기도 하고 '무기력'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약물이나 게임, 포르노 등의 중독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 같기도 하고, AI와 로봇 등에 일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자기 효능감을 잃어버리고 무기력 상태에 빠진 모습 같기도 하다. 앞으로 인류가 살아가게 될 세상에서 인간의 손길이 필요한 영역이 점점 줄어들면 인간들은 숏폼이나 동영상, 미디어, 생산품의 소비자로서만 그 존재가치를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놀아야 되는지 방법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견딜 수 없는 지루함'이라는 병에 걸려 감정을 잃어버린 삶을 살지도 모른다. 아직은 먼 세상 얘기 같지만 오늘도 숏폼 동영상에 빠져 멍한 표정으로 헛웃음만 짓는 내 모습 속에서 그런 조짐이 조금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