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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병묵 Jul 27. 2022

하나님의 사랑(헷세드)의 이해

헷세드의 이해(임병묵)


1. 헷세드 개념정립 시기 시대상황과 성서에서의 기술

■ 이스라엘 고대사 개요

■ B.C 8세기경 호세아서에서의 헷세드

    - 사회적상황에서의 헷세드

    - 사적상황에서의 헷세드

2. 헷세드(Hesed) 어원

3. 구약연구에서의 헷세드

4. 종합





1. 헷세드 개념정립 시기 시대상황과 성서에서의 기술

■ 이스라엘 고대사 개요

기원전 10세기 경 시대는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의 시대로 이스라엘의 전성기였다고 기록된다.

BC 971~970: 솔로몬 즉위, BC 968~967: 성전건축, BC 931~930: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 분열


다윗은 일생에 걸쳐 수십번의 전쟁을 통해 12지파로 갈라진 이스라엘 민족을 통일하고 주변국을 병탄한다.

이스라엘 주변으로는 암몬, 모압, 에돔, 티레, 시돈과 같은 페니키아 계열의 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스라엘을 비롯한 이들은 페니키아어(히브리어)을 사용하였고,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은 민족이었기 때문에 다윗과 솔로몬은 이들을 쉽게 합병시켜 단시간 내에 영토를 넓힐 수 있었다.

북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는 아람(오늘날 시리아)까지 남쪽으로는 요르단강의 동편(오늘날의 요르단)과 이집트의 나일 강까지 걸쳐 있었다. 또한 페니키아의 뛰어난 조선기술과 운수기술을 통해 이스라엘을 지중해의 서쪽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다시스와 홍해로 나아가는 에시온 게벨 항을 통해 인도와도 교역을 할 수 있었는데 그 덕분에 이스라엘은 오리엔트 국가들 중 어느 국가보다도 부유한 상업국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하지만 솔로몬 말기에 들어, 다윗 왕의 정복전쟁의 결과로 민족주의적 저항의식이 싹튼 아람과 에돔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스라엘의 통치에서 벗어났으며 모압과 암몬에 대한 영향력도 줄어들게 된다. 또한 이스라엘의 무역을 돕던 레바논 지역의 페니키아계 왕국들마저 독립하여 이스라엘과 무역경쟁을 하게 되었고, 솔로몬 사후에는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의 10지파를 이끌고 반란에 성공하여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게 된다. 이후로 아람과 에돔은 각각 아시리아와 로마 제국에게 멸망당 하기까지 이스라엘과 수시로 전쟁을 벌이게 된다.

솔로몬 사후 그의 아들 르호보암 왕에게 반기를 든 이들이 여로보암을 지지하면서 왕국은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여로보암은 북부의 10지파를 장악하여 북이스라엘 왕국을, 르호보암은 남부의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장악하여 남유다 왕국으로 분리되면서 히브리인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후손인 사마리아인, 남유다 왕국의 후손인 유대인으로 나뉘게 된다

분열 이후로 두 왕국은 서로 경쟁하며 약소국으로 남았다. 남유다 왕국은 유다 지파 만의 왕국으로 다윗의 언약을 명분으로 왕권 강화와 세습을 이어갔기에 왕권이 안정되어 있었던 반면, 북이스라엘 왕국은 10개의 지파의 연합체이기 때문에 과거 사사들처럼 지파별로 돌아가면서 왕이 선택되는 제도였다. 따라서 왕가의 힘은 귀족들의 견제 때문에 약했으며 제사장 지파였던 레위 지파가 오히려 왕보다도 막강했다. 그래서 왕이 10지파의 대표로서의 자격이 없거나 의심되면 쿠데타도 손쉽게 벌어졌고, 실제로 8번이나 왕가가 바뀌었다.

* 사사: 이스라엘의 군사, 정치 지도자. 소송과 분쟁을 해결하는 ‘재판관’으로서의 성격이 강했으나 점차 그 범위와 영향력이 정치나 군사 등으로 확대되었다. 사사기에 기록된 사사는 열두 명인데, 6명의 대사사로는 옷니엘, 에훗, 드보라, 기드온, 입다, 삼손이 있고, 6명의 소사사로는 삼갈, 돌라, 야일, 입산, 엘론, 압돈 등이 있다.

이 시기쯤에 고대 근동은 농경문화중심사회로 바알교가 널리 퍼져 있었다. 다신을 숭배하는 바알교는 농업의 기반이 되는 강한 생식력을 풍요의 축복으로 간주하고 성애적 제사와 강한 생식을 상징하는 황소를 우상화하고 있어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신전신녀가 매춘부를 겸하기도 했고, 창세기의 유다 역시도 며느리가 신전 매춘부인 줄 알고 착각하여 관계를 맺을 정도로 사회전반에 성적 문란이 조장되어 있었다. 이는 상대적으로 성에 엄격했던 유목민의 유일신 야웨와 여러 측면에서 배치되었으나 출애굽 한 후 가나안에 정착, 유목 문화에서 농경문화로 전환되면서 가나안 사람들에게서 농사기술을 배운 이스라엘 사람들이 농사의 풍요를 약속해 주는 바알 예배에 동화되기 쉬웠다. 또한 당시 강성 해양국가인 북방의 베니게는 무역과 상업으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솔로몬, 아합 등 왕들은 이 베니게와 친교를 원했고 그 방편으로 베니게의 바알을 이스라엘에 보급시키는 데 적극적이었다.

 가나안 정착초기에 가나안 문화와 제의에 대한 엄격한 경계를 성경에서 쉽게 볼 수 있었지만 이 시기 일반백성들은 현대 유대교처럼 오직 야웨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야웨도 믿고 가나안의 토착신이나 다른 지방의 신들 함께 믿는 혼합주의(Syncretism)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다.

국력은 북이스라엘이 압도적이었고, 특히 오므리 왕조 2대 왕인 아합 왕은 페니키아 공주 이세벨과 혼인하고 딸 아달랴를 남유다 왕비로 시집보내는 등 페니키아, 아람, 남유다를 연합한 맹주가 되어 아시리아의 침공을 물리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이 먼저 아시리아 제국에게 멸망당하고 왕족과 귀족들은 살해당하거나 아시리아 본국으로 끌려갔다.

한편 남유다 왕국의 여호사밧은 이집트를 동맹으로 삼아 아시리아를 견제하고 므낫세는 아시리아의 전성기 때 친아시리아 정책을 요시야는 아시리아가 쇠퇴하자 유다의 중흥과 야훼 신앙 진흥을 꾀하면서 생존해 갔다. 요시야는 북왕국의 고토를 회복하여 통일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사업 자체가 "야웨의 뜻"이라는 명분으로 국가의 역량을 결집하고 백성들을 동원했다. 따라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규모 사업을 일으켜 혼합주의적 신앙를 뿌리뽑고 야웨만을 섬기는 일신주의를 확고히 정착하려 했다. 열왕기下에는 다음과 같이 그 시작이 기술 되어 있다.

*열왕기(列王記): 유대교의 타나크(히브리어 성경)의 일부로 나중에 기독교 구약성경의 일부로서 받아들여졌다. 기원전 10세기에서 기원전 9세기까지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며 상하로 구성

성전을 수리하던 도중 우연히 성전 안에 있던 율법서를 발견했고, 이를 읽은 왕이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고 율법서를 기반으로 이방 신상의 철거, 예배 방식의 정화, 유월절 같은 유대교의 절기 준수 등의 대규모 개혁을 행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종교 개혁은 옛 북왕국의 영토였던 벧엘에서도 이루어졌다. 벧엘은 북이스라엘의 시조인 여로보암 1세가 초기에 수도로 삼았던 곳으로, 여로보암은 이곳에 자신만의 성전을 세웠는데(송아지의 형상 숭배), 요시야는 이 성전의 제단과 산당을 헐고 무덤을 파내 해골을 제단 위에서 불태웠다. 이러한 퍼포먼스는 오직 예루살렘의 성전만이 야웨 일신주의 신앙의 정통임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자연스럽게 권력을 예루살렘에 있는 왕에게 집중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또한 이를 통해 요시야 시대 남유다가 북왕국의 고토를 어느 정도 수복하였고 그 배경이자 원동력에는 종교적 열정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도 근본적으로 민중들의 영적 세계를 바꿔놓지는 못했다. 그러기에는 민중들의 일상생활 속에 혼합주의적 다신교는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고고학적으로도 7세기 말엽의 거주지에서는 여전히 가슴을 손으로 받친 채 서있는 여신의 작은 조각상이 발굴된다. 하지만 이 시대에 확립된 모세오경은 이후 유대교가 체계적인 일신교로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 유대교를 뿌리로 한 기독교와 이슬람까지 영향을 미쳤다.

* 모세오경: 토라라고도 불리는 구약 성서의 최초의 5개의 책이다. 모세가 썼다는 전승이 있었으므로 모세오경이라고 말해지지만, 근대 이후의 '문서 가설'에선 다른 시대의 합성 문서라는 가설을 세워 모세가 직접 썼다는 설을 부정한다. 다만 보수적인 기독교회와 학자는 오늘도 모세 기자설을 지지하고 있다.

또 다른 의의는 정치적,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찾을 수 있다. 먼저 각 지방에 흩어져 있던 종교적 권위를 통합하여 예루살렘으로 이전하였다. 이는 종교적인 중앙집권화이자 왕권의 강화로 읽을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는 신명기에서 나타나듯
 *신명기: 구약 성경 중의 한 권으로 모세 오경의 마지막권에 해당되는 책이다. 신명(申命)이란 계명(誡命)을 거듭 되풀이하여 알려준다는 뜻. 히브리어 원어는 말씀을 뜻하는 데바림(Devarim)이다. 예수가 사탄의 세 가지 유혹을 뿌리친 세가지 말씀 모두 신명기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종교 개혁은 사회 제도의 개혁을 동반하였다. 여러 선지서에서 이야기하듯 북이스라엘이나 남유다나 경제적인 성장과 함께 빈부의 격차, 부익부 빈익빈의 문제, 힘 있는 자들의 횡포가 문제가 되었는데, 신명기에서는 약자를 보호하고 법에 따른 사회 정의를 구축하도록 이야기하고 있다. 신명기가 요시야 시대(BC 648-609)에 쓰여진 것이라면, 종교 개혁은 단순히 신앙적인 개혁이라기보다는 사회 전체의 복지와 정의, 공정함을 세우려고 했던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시야가 이집트 왕 느고에게 죽고 이집트에 종속된 후 마지막에는 新 바빌로니아의 침입에서 이집트가 남유다 왕국의 원군 요청을 무시해 멸망했고 주민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러한 바빌론 유수 과정에서 남유다 왕국의 후손인 유대인들은 신 바빌로니아 제국의 언어인 아람어를 익히게 되었고, 이것은 훗날 예수의 모어로 이어졌다.

 이러한 시대상황의 변화과정에서 유일신 야웨교 또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어 갔다.


2. B.C 8세기경 호세아서에서의 헷세드

* 호세아서: 유대교와 기독교 성경의 예언서 중 하나로, 12소예언자 중 하나인 북이스라엘의 호세아가 기원전 8세기경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계에서는 호세아 사후에 북이스라엘이 망하며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남유다 사람들이 엮은 예언서라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보고 있다.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여로보암 2세 시대인 기원전 745년경부터 북이스라엘이 멸망을 앞두기까지 20여 년 동안 활동한 예언자이다. 동시대의 예언자는 남유다의 아모스가 있었으며 이 때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의 압박 속에 시달리며 내부에서도 왕을 몇 명이나 갈아치우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백성들은 이방신인 풍요의 신 바알을 섬기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곡식과 햇포도주, 기름도 주셨는데 그것도 모르고 이방신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회개시키고자 호세아에게 신탁을 내리는 것이 호세아의 내용이다.


□ 사회적상황에서 헷세드

 아시리아의 아닫-나라리가 다메섹을 침공하여 황폐하게 만들어 이스라엘은 다메섹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 지고 영토를 회복하고 확장할 수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아시리아도 전력을 소모하고 내정문제로 세력이 약화되었고 북방 우라르트왕국이 아시리아에 견줄 세력으로 성장하여 균형을 이루게 됨으로써 여로보암2세의 북이스라엘은 우호적 국제 정세 속에 전성기를 맞이 한다. 강대국의 세력이 소강상태인 이 시기에 이스라엘은 주변강국과 합종연횡하면서 요르단을 정복하여 시리아 쪽의 교역로와 이라비아쪽의 대상통로를 장악 무역, 상업, 문화 등의 경제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이시기 애굽(이집트)과 동양에서 장식을 수입할 만큼 상인, 귀족을 중심으로 부가 집중되어 빈부의 격차가 증가하였고 부를 이용한 땅의 매매와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돈과 식료품의 고리대부가 횡행하였다 이처럼 B.C 8세기 이스라엘의 사회 경제적 상황은 정착 생활과 도시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가나안의 사유재산 개념과 상업 만능주의로 옛 씨족 윤리는 파괴되고, 부익부, 빈익부의 구조적 악과 부정, 향락주의, 금전 만능주의 등 사회병폐가 만연되기 시작 하였다. 여로보암 2세가 죽은 후 뒤를 이은 스가랴는 6개월 만에 살룸에 살해되고 살룸은 한달 후 므나헴에 므나헴의 아들 브가야는 베가에게 살해되었고 베가는 다메섹의 르신과 아시리아에 반대하는 동맹체를 만들고 유다를 공격 했으나 유다를 지원하는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죽고 아시리아의 꼭둑각시 왕은 애굽(이집트)에 도움을 요청했다가 아시리아에게 사마리아(Palestine의 북부 지방)을 정복당하고 3만명이 포로로 잡혀간다.

호세아는 이시기 북이스라엘의 혼란을 출애굽, 광야시대의 여정에서의 하나님의 은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잊은 불신앙의 모습에 대한 아시리아 등을 도구로 한 하나님의 징계로 또 그 징계가 멸망이 목적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정치와 도덕이 철저히 왜곡되어 버렸기 때문에, 파멸에서 구원하려는 징계를 통한 철저한 정화의 과정이며 주변국으로 부터의 파괴와 유배를 애굽포로 생활로 묘사하며 두 번째 광야에서의 유량 생활을 예언하며 이스라엘을 일깨우고 구원을 소망하도록 자극하기 위한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한 사랑 헷세드 임을 알리고자 한다.


□ 개인적상황에서의 헷세드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 남자가 여자를 취하는 것은 재산취득으로 간주하였고 남자는 사소한 문제라도 이혼할 수 있으나 여자는 이혼을 먼저 제기 할 수 없었으며 남자의 경우는 아내의 허락으로 다른 아내를 맞을 수 있으나 여자는 결혼하면 남자에게서 떠나지 못하기에 부부관계의 파괴는 여자의 부정으로 기인하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회에서 하느님은 호세아에게 "너는 바람기 있는 여자와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아라."하고 명령한다. 호세아는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 디블라임의 딸 고멜이라는 음탕한 여자를 만나서 결혼해 3남매를 낳는데, 남매들의 이름이 장남 이즈르엘(다가올 심판의 표징), 딸 로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 막내 아들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로 짓는다.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아내는 바람나서 도망갔다가 노예로 팔려간다. 사실 이는 하느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이방신을 섬기는 유대 민족을 표현한다. 그리고 호세아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고멜의 주인이 요구한 노예값인 15세겔과 보리 1호멜 반을 주고 고멜을 다시 사 온다. 이건 그럼에도 끝까지 유대 민족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뜻한다. 여기까지가 호세아 3장까지의 이야기이다.


호세아서 4장부터 12장까지는 이스라엘을 향한 강도 높은 경고가 이어진다. 호세아는 자신의 삶을 거울삼아 하느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파했지만, 호세아의 말을 듣지 않은 북이스라엘은 13장에서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마지막 14장은 그래도 이스라엘이 다시 하느님께 돌아온다면 병든 마음을 고쳐주고 사랑하겠다는 메시지로 예언서를 끝맺는다.
 

2. 헷세드(Hesed) 어원

* BDB:  구약 히브리어 사전[브라운, 드라이버, 브릭스, 1906]

IDB: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Abingdon, 1962]

DB: Dictionary of the Bible[Charles scribner’s sons, 1900]


3. 구약연구에서의 헷세드

*LXX: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을 통상 “70인역“이락고 부른다. 영어로는 70을 의미하는 라틴어 Septuaginta를 영어로 만들어 Septuagint라고 하고, 또 간단히 로마숫자 70에 해당하는 LXX로 표기


4. 종합

헷세드는 언약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반응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하며 또 인간 피차간에 나누는 사랑 즉 언약에 기초한 선, 자비, 사랑, 은총 자체로서 이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 행하는 것으로 “언약에 기초한 언약적 사랑”을 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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