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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다 Jul 08. 2024

오십춘기의 가벼운 자살 충동

가끔 죽고 싶지만 죽는게 무서워



가끔 자살 충동을 느낀다. 어떻게 죽을까 자살 시나리오를 쓰기도 한다.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대교를 지나가노라면 조금만 핸들을 틀면 어떻게 될까. 아주 오래전 영화 ‘델마와 루이스’처럼 손을 잡고 뛰어들 친구는 없어도 혼자 멋있게 죽을 수 있을까. 어떤 영화에서 바다나 강물 속으로 빠진 자동차 안에서 안전벨트를 풀지 못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창문을 두드리던 장면이 생각났다.

장마로 수위가 불어난 강변을 산책하고 있으니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나의 모습이 연상된다. 밤에 들어가면 아무도 모르겠지. 혼자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며 들어가다가 물이 가슴팍에까지 올라오면 너무 추워서 견디지 못하고 돌아서서 나올 것만 같다.


아니면 코엘료의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서처럼 약을 먹는다면 어떨까. 수면제를 모아야 한다는 애로점이 있고 실패할 확률이 크다. 차라리 확실하게 농약이나 청산가리를 먹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고층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지만, 떨어져 죽은 사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폭력적이고 무섭다. 만약 어린아이가 그런 장면을 목격한다면 엄청난 트라우마가 될 것이다.


역시 그 방법밖에 없을까. 교수형 당하는 것처럼 목을 매달아 죽는 것이 가장 깔끔하게 생각되었다. 개인적으로 알던 분이 암을 선고받은 후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목매달아 죽었다는 비보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이후로 한번씩 그 장면이 연상된다. 영화에서처럼 의자 위에 올라서서 올가미에 목을 쑥 넣고 의자를 걷어차는 것이다. 그다음 순간 천장에 단단히 고정되지 못한 올가미가 빠져 버린다. 젠장, 나란 인간은 왜 상상 속에서도 자살을 성공시키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죽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데, 뭐가 부족해서 이 세상을 스스로 떠난단 말인가.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로 살라고들 말한다. 순간순간 충동적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치밀어 오른다. 살아갈 날들이 그저 암담하기만 하다. 계속 살아도 더 이상 좋은 날은 오지 않을 것 같다. 이런 사람이 어찌 학생을 가르치고 밖에선 거짓 웃음을 짓는단 말인가.



가깝다고 생각하는 두 사람에게 고백을 했다. 그건 누군가가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이렇게 힘들다는 것을 누가 알아 주었으면 하는 기대.

한 사람은 병원에 가라고 했다. 우울증 약을 먹으면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아는 사람의 사례를 들어 진지하게 충고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정신과나 심리 상담실 같은 곳에 가본 적이 없다. 자주 우울의 구렁텅이에 빠지지만 증상이 심하지 않고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또 나를 가로막는 것은 자존심이다. 나의 문제를 다른 사람을 통해 해결하고 싶지 않다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에게 얘기함으로써 우울한 기분을 해소하려고 하다니 아이러니다.


또 다른 사람인 언니에게서도 큰 위로를 받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나에게 우울하다는 얘기를 너무 자주 들어서 식상했을 것이다. 나의 부정적인 기분이 자신에게 전염되는 것이 싫을지도 모르고, 안 그래도 유쾌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꾸 그런 하소연을 듣고 있으면 솔직히 짜증이 날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이렇게 징징거리면서도 내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걸 뻔하게 안다는 것이 진지한 반응을 가로막는 주요 원인일 것이다.


이젠 어디 땅에 굴이라도 파서 읍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무 구멍에 대고 잊지 못한 사랑을 외치던 양조위는 로맨틱하기라도 하지, 오십 넘은 중년의 부르짖음은 아름답지 않다. 죽고 싶다는 넋두리는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마음속에 고여 썩고 있다.

결국 모든 문제는 나의 것, 해답도 내 안에 있다. 그 누구도 나의 문제를 나만큼 고민하지 않으며 나만큼 아파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고민이 있고, 그것이 상대적으로 누구보다 작은 고민이라도 해도 자신에게는 크나큰 것이다. 태산만 한 고민이라도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물지는 않는다. 삶은 강물처럼 흐른다. 고통의 순간은 지나간다. 조금 덜 힘든 날이 오고, 그러다 무덤덤해지다가 다시 암울한 날들이 오기도 한다.


몇 년 전 ‘죽고 싶어도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을 일부분 읽고 평상시 나의 증상이 기분부전증이라는 것을 알았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라는 좋아하는 음식 때문이라도 삶을 유지할 수 있으면 된 거 아닌가. 그 떡볶이라는 존재가 나에게는 무엇일까. 때로는 쫄깃한 꽈배기가 되기도 하고 자식이 되기도 하고 언니가 되기도 하며 여행이 되기도 하고 글쓰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도 기운을 내어 직장에 가고 저녁식사를 차리고 글을 쓰고 있다.

이제 고비는 지나갔다. 당분간은 괜찮을 것이다. 나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매일 하루버텨 보기로.



#누구나이럴때가있다    #사랑받지못하는관종인가   #자살상담전화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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