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내게는 짝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 푸른 남방이 잘 어울리는 키가 큰 사람이었다. 그의 수업을 듣는 학생도 아니었고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지만, 그의 고독하고 잘생긴 외모에 반해 혼자 사랑에 빠져들었다. 어쩌면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내 인생이 외롭고 희망이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연히 마주치거나 먼발치에서 그를 보면 하루 종일 설렜고 또 아팠다. 1년 동안의 수업이 끝나고 과정을 수료할 시기가 되자 마음은 요동을 쳤다. 취업을 목적으로 학원에 다녔으나 적지 않은 나이로 인해 취직은 어려웠고, 내 재능을 눈치챈 어떤 선생님이 파트타임을 제안하셨으나 결국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렇게 우울한 현실에서, 아니 현실이 비참할수록 마음의 거울에 떠오른 그의 모습은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누구보다 순수하게 그를 사랑했지만, 이제 이별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과정을 수료하고 더 이상 그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자 갑자기 어디에서 용기가 생겼는지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썼다. 친구의 감수를 받고 지나치게 감정적인 부분을 덜어내어 고친 두 장의 편지를 우체통에 넣었다. 직접 줄 용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와 사귈 것이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한 번은 연락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종일 삐삐를 주시했지만, 끝끝내 연락은 오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의 어느 추운 겨울이었다.
사랑을 잊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 대상을 만난 기간의 두 배는 필요하다고 누군가 말했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으나 내 사랑은 보답받지 못했고,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음으로 인해 인생은 피폐해졌다. 어느 늦은 밤에는 시내버스 안에서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누군가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지만 눈물은 닦는다고 감춰지는 것이 아니라 빗줄기처럼 흘러내렸으니까.
1995년에 첫 개봉된 영화 ‘중경상림’에는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는 두 명의 경찰이 나온다. 만우절에 여자 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경찰 223은 여자 친구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자신의 생일이자 한 달 후인 5월 1일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유통기한이 5월 1일까지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러 돌아다닌다. 이미 헤어진 여자 친구에게는 다른 남자가 생겼고, 223은 여자 친구가 좋아했던 파인애플 통조림을 먹으면서 괴로워한다. ‘기억이 통조림에 들어있다면 유통기한이 만 년이었으면 좋겠다’고 읊조리면서. 그리고 술집에서 제일 처음 들어오는 여자를 무작정 사랑하겠다고 결심한다.
경찰 663(양조위)은 스튜어디스 여자 친구를 잊지 못하고 있다. 그녀를 위해 음식을 사가던 간이음식점에서 663은 떠난 여자 친구가 맡기고 간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된다. 하지만, 663은 씁쓸한 표정으로 음식점에서 편지를 맡겨두고 나중에 가지고 가겠다고 한다. 이미 자기 곁을 떠난 여자 친구가 맡긴 편지의 내용을 짐작하지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숱한 시와 소설에 나타난 ‘사랑하는 님은 갔으나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한’ 마음. 아직 663의 마음은 연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깊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663의 집에는 다 떨어진 행주마저 그의 마음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흰 메리야스 차림의 남자가 멋지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한 양조위.
인물이 223, 663이라는 숫자(익명)로 나온 것은 그가 내가 될 수도 있고 이별의 아픔을 겪어본 누군가의 마음이 대입될 수 있다는 게 아닐까. 사랑은 함께 마주 보는 사랑만이 있는 게 아니고 홀로 하는 사랑도 있고, 한때 사랑했더라도 사랑의 끝이 다를 수도 있다. 시작과 끝이 같다면 조금은 덜 서글플 것인데, 마음이 엇갈리는 풍경이 바로 우리네 인생인 것 같다. 그렇게 헤어지고 나면 영원히 사랑을 지우지 못할 것처럼 애달파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온다. 다른 사람으로 사랑의 고통이 치유되기도 하고, 그런 사랑을 만나지 못하면 기억 속에서 사랑의 아련한 추억이 미화되어 남기도 한다.
세기말 로맨틱했던 사랑의 풍속도가 많이 바뀐 것 같다. 2000년생의 사랑은 어떨까.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은 마찬가지일지라도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연애편지에 시를 옮겨 쓰며 마음을 전하던 책 읽는 세대에 비해 MZ세대는 화려한 이벤트에 더 관심을 두는 것 같이 보인다. 이별도 쿨하게 하고, 쉽게 잊고 다른 것에 몰두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나의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러브 레터 대신 긴 문자로, 또는 SNS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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