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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 Sep 30. 2022

현재 살기

무언가에 매몰되지 않기

좋은 사람을 만나면 무언가를 배운다. 나를 드러내는 시간에 부담을 느끼면서 왜 나는 나를 드러내려고 할까 생각해봤다.


나는 나의 이상향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한다. 


욕심내지 말 것.


과시하지 말 것.


껍데기가 되지 말 것.


다시 새겼다.


좋은 사람이 나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좋다.


따뜻함을 느낀다.


그런데 나도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사람이 성장하고 배우며 바뀌곤 한다는 사실을 나는 믿을 수 있을까.


누가 나를 붙잡고 설득해줬으면 하는 시간이다.


"너는 괜찮은 사람이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왜 더 나은 내가 되어야 할까.


왜 성장을 해야하는 걸까.


꿈, 이상향, 이런 것들이

오히려 현재의 나를 괴롭히는 것은 아닐까.


더 나은 나를 바라고 더 나은 날을 바라는 시간을 살고 있다면

과연 현재를 사는 것이 맞을까.

오지 않을 미래를 기다리며 현재를 소진시키는데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의 나보다 나은 나를 바라는 게 맞는 일일까.


그럼 나는 못났나. 

지금의 나는 못났나.


왜 성장하려고 해야 하지.


성장이 꼭 그런 방향이어야만 할까.


성장의 반대는 안주인가.


못난 나를 사랑하는 게 안주하는 걸까.


나는 꼭 바뀌어야만 할까.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바뀐 게 별로 없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성장해온 게 맞는데

갈 길이 멀다고 느껴지는 건 

덜 성장해서가 맞는 걸까.


도달할 지점이 없는데도 그저 나를

깎아내리며 심판대에 올리는 것이 아닐까.


어이, 너 거기서 상처받고 있잖아.


되고 싶은 나를 정하고 그것이 되려 노력하는 사람

내가 맞나.


그렇게 그런 사람이 되면

내가 맞나.


언젠가 나에게 솔직해지는 순간이 온다면 그 순간은

예전의 내가 발가벗고

이상향이 된 나에게 짓밟힌 모습을 하고

그때의 내 등에 칼을 꽂는 순간이 아닐까.


미래를 바라보는 일은 꽤나 기분이 좋다.

그땐 지금의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들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으니.


그럼에도 다시 현실은 처절하게

결핍에서 허우적대니까

미래를 바라보는 것은 꽤나 고독하다.


명랑한 현실주의자가 바라보지 못하는

음침한 이상주의자의 미래는

임마누엘 칸트의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혹은

신이 죽은 

바보같은 자기연민의 세상.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나를 드러내는 방식

세상에게 나를 보여주는 방식

세상을 흡수하는 방식

남들을 바라보는 방식

남들을 받아들이는 방식

나를 소명하는 방식

나를 소진시키는 방식

나를 채우는 방식

내가 상처받는 방향

내가 행복해지는 방향

내가 건강해지는 순간

내가 태초로 돌아가는 순간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순간

나를 혐오해야만 하는 순간

남을 탓하는 순간

세상에 등을 지는 순간

나를 방어하는 태도

남을 공격하는 태도

남을 사랑하는 방법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순간


1. 세상의 부조리함을 인정할 것

2.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할 것


나는 잘 쓰러졌다.

잘 다쳤으니

잘 아물어야지.


흉터가 남으면

그건 성장의 증거다.


놀랍게도 글을 쓰면서

인간의 변화를 믿게 된다. 


나의 평안과 평화를 내가 가장 바란다.

그리고 그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길 바란다.

내가 평화로와서

그 결과로

내가 평화로웠으면 좋겠다.


나의 평화의 인과는 

단지 나의 평화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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